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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신영순(申永順)
갱신일 2016-10-31

정의

날것을 익힐 때 사용하는 주방용구. 밥을 짓거나 국 또는 물을 끓이는 데 사용한다. 주로 무쇠로 만들어 ‘무쇠솥’이라 하고, 부엌에서 가장 큰솥을 ‘조왕솥’이라고 부른다. 솥은 한자로 ‘정(鼎)’이나 ‘부(釜)’로 표기한다. 『우공(禹貢)』에 따르면 솥은 하(夏)의 우왕(禹王)이 주조한 9개의 정(鼎)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鼎)은 음식을 조리하는 용도뿐만 아니라 왕권, 국가, 제업(帝業)의 뜻을 지님으로써 신성시하였다.

역사

고대 사회에서 솥은 단순히 음식물을 조리하는 물리적인 용기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로서 왕권, 힘, 국가, 제업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공신들의 공적을 기록하거나 부정한 관리를 처벌하는 형구, 종교적 의기(儀器)나 죽은 자의 식량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동주(東周) 이래 술잔[爵], 술그릇[尊], 청동솥[鼎]이 왕권의 상징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효무본기」를 보면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복희가 만든 신정(神鼎)은 통일과 천지 만물의 귀결을 의미하였고, 황제가 만든 보정 세 개는 천․지․인을 상징하였다. 하의 우왕은 전국 구주(九州, 9부족)의 금속을 모아서 구정(九鼎)을 주조하게 하였다. 이를 소유하는 자는 곧 천자로 여겼다.”고 하였다.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보면 “기원전 606년에 초(楚)의 장왕(莊王)은 주나라 국경 지역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천자가 보낸 대부 왕손만에게 천자가 가지고 있는 솥의 크기를 물어보았다. 이에 왕손만은 임금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을지라도 무거워 옮기기 어렵고, 그 덕이 비뚤어지고 어리석으면 비록 크다 해도 가벼워서 옮기기 쉽다고 하였으며, 주나라의 천명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솥의 무게를 물어 천자의 자리를 엿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주나라에는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나라에서 감히 북방(北方)을 엿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왕의 덕을 솥의 크기와 비교하고 왕권의 강대함을 솥의 무게로 표현함으로써 솥을 왕권의 상징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힘이 장사인 진나라 무왕은 기원전 307년 8월 맹설(孟說)이라는 장사와 솥을 들어올려 서로 힘을 겨루었다. 그러나 이를 들어 올리던 무왕은 경골(정강이뼈)이 부러져 이로 인해 얼마 후 죽게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를 보면 “42년 겨울 12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부여를 치러 가다가 비류수 옆에 이르러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그 솥에 밥을 짓게 하였더니 불을 때기 전에 저절로 열이 나서 밥이 다 되어 군사 전체를 배부르게 먹일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웬 건장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이 솥은 우리집 물건으로 나의 누이가 잃었는데 지금 왕께서 얻었으니 청컨대 제가 솥을 지고 왕을 따라 가겠습니다.’ 하므로 그에게 부정(負鼎)이라는 성(姓)을 주었다. …(중략)… 밤에 탈출하다가 골구천에서 얻은 신비로운 말과 비류수 상류에서 얻은 큰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서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군사들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사례를 통해 솥이 힘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솥의 소유 여부는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어 한 나라의 군사력, 힘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고국천왕조에서는 “왕의 신장은 9척이고, 자태와 표정이 씩씩하고 뛰어나며, 힘이 능히 솥을 들 만하였고(上王身長九尺姿表雄偉力能扛鼎蒞事聽斷寬猛得中)”라 하여 고국천왕이 힘이 세다는 내용을 솥을 들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 보장왕 2년에는 개금이라는 사람이 솥의 다리가 세 개인 것처럼 나라에는 세 가지의 종교, 즉 유교․불교․도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받아들이기도 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에서는 “어떤 스님이 절을 지을 철물을 구하자 어머니는 철솥으로 시주하였다. 이 일을 진정에게 알리자 진정은 기뻐하며 질그릇 동이로 솥을 삼아서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솥이 집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1권 총서(總序) 30번째 기사를 보면 “8월에 수양대군의 잠저(潛邸) 가마솥이 스스로 소리 내어 울었다. 잠저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의혹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옛글에도 있으니 이는 잔치를 베풀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무당 가운데 비파(琵琶)라고 불리는 자가 있었다. 그가 급히 달려와서 청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를 알현하고 ‘이는 대군(大君)께서 39세에 등극(登極)하실 징조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대비가 놀라서 물으려고 할 때 무당은 더 고하지 않고 갔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솥은 왕의 계승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라의 건국이나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의 치적을 솥과 종에 새겨 후대에 기리게 하였다. 이 밖에 솥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를 처벌하는 형구, 사찰에서는 불사리를 넣어두는 도구 등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서도 솥을 드는 것을 삼군 갑사를 뽑는 기준으로 삼아서 힘의 경중을 비교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은 커대란 월대 위에 앉혀져 있다. 월대는 국가의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상하 두 단으로 된 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계단을 두었다. 여기에 왕권을 상징하는 솥[鼎]이 있다. 이 솥은 배가 둥글고, 다리가 셋이며, 귀가 둘이다. 솥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고 하늘의 복을 기원하는 상징물로도 쓰였다.

형태

솥은 음식물을 조리하는 도구로서 시대에 따라 돌, 토기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주철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청동솥, 무쇠솥 등이 만들어지면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솥은 냄비와 달리 밑의 두께가 두꺼워서 음식이 잘 타지 않으며, 부엌의 부뚜막에 걸고 음식을 조리하게 만들어졌다. 솥의 밑은 그다지 우묵하지 않고 약간 편평한 편이다.

솥은 크게 정(鼎), 부(釜), 노구(鑪口) 세 가지로 나뉜다. 부는 큰 가마이다. 다리가 없고 밑이 약간 둥글되 옆은 편평하고 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었다. 정은 다리가 달려 있고, 대․중․소 세 가지로 구분하며, 옆이 넓고, 밑과 뚜껑이 거의 같은 모양으로 둥글다. 노구는 놋쇠나 구리쇠로 만든 솥으로, 자유로이 걸었다가 떼었다가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밖에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섬용지(贍用志)」 취류팽약지기편(炊餾烹瀹諸器篇)에는 “옛날에는 다리가 있으면 기(錡)라 하고 없으면 부(釜)라 하였다. 대구(大口)는 부(釜), 소구(小口)는 복(鍑)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정과 기는 세 발[다리]이 있는 솥이며, 부와 복은 다리가 없다. 또한 솥의 크기에 따라 ‘서말치’․‘두말치’․‘외말치’, 기능에 따라 ‘밥솥’․‘국솥’․‘찬솥’으로 각각 구분한다.

내용

전근대사회의 일반 서민들에게 솥은 가족의 안녕과 가정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불씨와 동일시되었다.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맏며느리에게 물려주듯, 부뚜막에 걸린 세 개의 솥 가운데 중앙에 있는 밥솥은 언제나 맏며느리가 관리하였다고 한다. 또한 ‘솥단지를 뗀다’고 하면 그 집안 전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감을 의미한다.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할 때에도 가장 먼저 서두르는 일이 ‘솥을 거는 일’이었다. 길일을 택하여 솥을 걸고 그날 밤 그 집에서 자고 나면 설령 살림살이를 옮겨가지 않아도 이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다.

솥에 대한 관념은 전근대사회로 갈수록 더욱 강하다. 신혼 초에 새댁이 음식을 조리하다가 솥뚜껑을 깨면 소박을 놓아 친정으로 돌려보냈으며, 아기를 낳아 처음으로 바깥에 나갈 때 솥을 쓰고 나가면 나쁜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솥을 장[市場]이나 대장간 등에서 사와 부뚜막에 설치할 때에는 길한 날과 시간을 보고 손 없는 날에 걸어야 한다. 길일에 솥을 걸지 않으면 동티가 나서 집안 식구가 아프다고 한다. 손 있는 날은 1일과 2일은 동쪽, 3일과 4일은 서쪽, 5일과 6일은 남쪽, 7일과 8일은 북쪽이다. 손 없는 날은 9일과 10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솥은 조왕신앙과 관련해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로 인식되어 많은 금기가 따른다. 이러한 금기를 통해 일반 서민들의 솥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솥은 중요한 조리도구이기 때문에 집안의 기둥인 주인 남자와 자식의 신변, 집안의 경제, 가족의 질병 등과 관련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게 하였다. 또한 음식을 만드는 도구이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게 보관하기 위해 관이나 시신이 있는 장소에 두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전근대사회 사람들의 위생관념을 엿볼 수 있다.

지역사례

전통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은 솥을 재신(財神)으로 모시고 솥씀과 소댕(솥뚜껑)꼭지 밟기, 솥찜질, 예언, 풍농 점치기 등과 같이 솥과 관련한 다양한 풍습이 행해졌다.

  1. 솥신앙
    일반 서민들은 솥을 가족의 안녕이나 가정의 운명과 관련이 깊은 재물신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 사례를 전국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제주도지역에서만 사례가 발견된다. 제주도지역에서는 이 신이 집안에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송씨 집안에서는 집안 할머니가 물질[潛水作業]을 매우 잘했다. 하루는 바다에 갔다가 뚜껑이 없는 솥을 주워와 집에 와서 물을 끓였다. 그러나 종일 불을 땠음에도 물은 끓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 솥 안에서 할머니가 나타나 자기를 잘 위하면 자손들 벼슬도 시켜주고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 뒤 그 귀신을 잘 위했더니 자손들이 서귀진 조방장, 명월만호 시의원, 대정원(大靜院) 등을 지내고 부자로 잘살았다. 그 후로 솥할머니를 고팡(곳간)에 안칠성으로 모시고 명절 제사 때마다 메를 올리게 되었다. 송씨와 그 집안 딸들이 시집가면서 솥신앙이 번졌다.

    표선면 성읍리 강씨 집안의 강선달네가 옛날 솥할망이 도와서 부자가 되어 잘살았다고 한다. 하루는 강선달이 바다에 갔다가 큰 무쇠솥 하나가 개맡(포구)으로 올라온 것을 발견하였다. 강선달은 그것을 주워와서 밥을 하고자 검불로 불을 땠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물은 끓지 않았다. 화가 난 강선달은 고팡으로 솥을 내동댕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서 “난 솥할머니이니 나를 잘 위하면 말로 섬으로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 뒤 제사 때마다 부엌에 밥 한 그릇을 차려 위하였더니 강선달은 삽시간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 후에는 굿을 할 때 ‘솥할망 군웅’으로 놀리고, 딸들이 시집을 가면 이 신이 쫓아간다고 한다.

    이 두 집안의 솥신앙을 살펴보면 솥신과 솥귀신할망은 제주도 송씨와 강씨 집안에서만 모셔졌다. 그러다가 두 집안의 딸들이 다른 지역으로 시집가면서 전파된 것이다. 육지부에서는 제주도와 같이 독립된 신령으로 솥신을 모시지는 않지만 조왕신이나 조왕의 기능을 하는 하나의 도구로 섬기고 있다. 솥신이 제주도에서 재물신으로 모셔지는 것은 육지부와 달리 제주도 같은 섬지역에서는 솥이 구하기 어려운 물건으로 인식되어 솥을 ‘부의 상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재물과 관련하여 ‘평소에 밥솥에 물을 부어놓지 않으면 재물이 마른다.’는 속담도 전하고 있다.

  2. 솥씀과 소댕(솥뚜껑)꼭지 밟기
    제주도지역에서는 ‘아기를 낳고 처음으로 바깥에 나갈 때 솥을 쓰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솥씀’ 풍속을 의미한다. 솥씀 풍속은 아기를 낳은 지 3~4개월 되어 처음으로 집 밖에 나가게 될 때 부정을 탈까 봐 뱅이(액막이)하는 것을 말한다. 솥을 쓴다는 것은 아기의 이마와 콧등에 솥밑 검댕을 바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나들이 할 때 솥밑 검댕을 바르고 나가면 솥밑 검댕에 관심이 쏠려 다른 사람들이 아기에게 부정한 말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솥밑 검댕을 바르는 풍습은 함을 팔 때도 이루어진다. 혼례 전 함진아비가 함을 팔기 위해 정방을 나설 때 얼굴에 솥밑 검댕을 칠한다. 이것은 불에 의해 만들어진 검댕과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조리하는 솥에 불[火]과 같은 제액초복의 기능이 있어 재앙과 액운을 막아 주고 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부는 혼례식신행길에 오르기 전에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세 번 들썩거려 소리를 낸다. 이는 새로운 삶과 신행길에 있을 액을 막아 달라는 의미이다. 솥은 여성의 주된 생활도구이기 때문에 솥과의 헤어짐은 그 집안 전체와의 분리(分離)를 뜻한다. 신부는 처음으로 시댁[媤家]에 들어갈 때 출입문 문지방 앞에 솥뚜껑을 놓아 밟고 들어가거나 안방 문턱 앞에 솥뚜껑을 엎어 놓고 가마채를 그 앞에 이르게 한 다음 신부가 내리면서 왼발로 솥뚜껑을 디디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간택(揀擇)할 때 궁 안쪽 문지방 바로 앞에 큼직한 가마솥 뚜껑을 엎어놓고 처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그 솥뚜껑 꼭지를 딛고 대궐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문지방은 공간과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문지방 앞에 솥뚜껑을 놓고 밟게 하는 것은 신행길에 따라왔을지도 모를 잡귀와 액을 정화시켜 새로 시작하는 삶이 복되기를 비는 것이다. 이는 신부가 시댁에 들어갈 때 대문 양옆에 짚불을 놓아 신부에게 붙어서 왔을지도 모를 액을 정화시키고 복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왜 왼발로 솥뚜껑을 디디게 하고 소댕의 꼭지를 밟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밖에 환갑이 든 해에는 생일날 부엌의 솥 앞뒤를 돌려놓고 밥을 해 먹으면 아무런 탈이 없다고 한다.

  3. 솥찜질
    솥찜질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한제국 말까지 각 지방의 큰 네거리에는 부정한 관리를 처벌하는 형구로써 솥과 부뚜막이 있었다고 한다. 솥찜질은 사람을 솥에 넣고 삶아 죽이는 시늉만 하는 공개처벌이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 솥을 이용하여 벌을 주는 것을 ‘솥찜질’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따금 서울 종로 네거리에 큰 솥을 걸어 놓고 부정을 저지른 관리를 솥 안에 들어가게 하였다. 죄인이 솥에서 나올 때 그는 주검 시늉을 하며, 형관에게 다른 이름을 받는다. 가족들은 살아 있는 시신을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 격식을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그러는 동안 살아있는 시신은 진짜 시신처럼 취급되어 평생 동안 격리된 채 살아간다.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도 금지되고,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된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면 주모는 망인에게 술을 판 것으로 여겼고, 그의 아내가 임신하면 과부가 애를 가졌다고 비웃었다. 큰 고을마다 솥찜질의 형벌을 시행하기 위해 큰 부뚜막과 솥이 네거리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솥찜질은 나라에서 사람을 솥에 넣고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시행하다가 사회가 명분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변화되면서 팽형을 다른 형태의 형벌로 변경시킨 것으로 보인다. 즉 솥찜질은 죄인을 솥에 넣고 삶아 죽이는 시늉만 하여 목숨은 살려 주되 그의 인격과 사회성을 박탈하는 명예형의 형벌이었다. 그런 이후에 이 형벌은 팽형이 아닌 우리말인 ‘솥찜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부정부패한 관리에게 가하는 불문율의 제재관습형(制裁慣習刑)으로 전해진 듯하다.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관리를 처벌하는 관습이 어떠한 연유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또 솥찜질이라는 불문율의 제재관습형이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다만 대한제국 말까지 이루어졌다는 솥찜질은 팽형이 이루어진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4. 솥 울음
    솥에 음식물을 찌거나 삶을 때 솥이 ‘부웅부웅’ 하고 울거나 소댕(솥뚜껑)이 들썩거려 김이 새어 나오거나 솥이 깨지는 꿈을 꾸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징조라고 여겼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밥솥이 울면 주인 남자가 부엌 안으로 들어가 앉고 아내가 남편에게 절을 하였고, 국솥이 울면 남편이 아내에게 절을 하면서 울음멎기를 바랐다고 한다. 또한 꿈에 솥이 깨지면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한다. ‘매일 정성 들여 밥하고 기일제사 때 메를 하여 조상을 위하는 솥이 깨졌으니 나쁘다.’는 제주도의 말이 이를 반영해 준다. 또한 『천문지(天文志)』의 맨 앞에는 솥별[鼎星]이 나온다. 이 별의 동태를 살펴서 이 별이 흔들려 보이면 나라가 불안하다고 한다. 솥을 나라의 신기(神器)로 여기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조에서 수양대군이 잠저에 있을 때 잠저의 가마솥이 스스로 울어 ‘이는 잔치를 베풀 징조이다.’라 하고 비파라는 무당이 대왕대비에게 “대군이 서른아홉 살에 등극하실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홍만선(洪萬選) 역시 『산림경제(山林經濟)』 권1 「복거」편에서 “솥이 우는 것은 시루[甑]가 비어 있어 기운이 차면 우는데 괴이할 것은 없으나 덮개를 열어 놓으면 즉시 그친다. 이것은 재앙이 되지 않으나 모름지기 남자가 여자 절을 하거나 여자가 남자 절을 하면 즉시 그친다. 또는 귀신의 이름인 파녀(婆女)만을 불러도 재앙이 되지 않고 문득 이로운 실익[吉利]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솥이 우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예측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나쁜 일만을 예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솥은 신성(神聖)을 지닌 신기로운 도구기 때문에 나라, 마을 공동체, 개인에게 앞으로 일어날 중요한 일에 대해 예언적 기능을 한다고 전통사회의 사람들은 믿었다.

  5. 솥 기우제
    날이 가물면 솥뚜껑을 이용하여 기우제를 지내면서 아들을 많이 낳은 맏며느리를 불에 달군 소댕(솥뚜껑) 위에 세워 놓고 키에 담은 물을 끼얹으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이때 사용하는 소댕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가장 중요한 솥의 소댕, 즉 조왕솥의 뚜껑이다. 기우제 때 조왕솥의 뚜껑 위에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아들을 많이 낳은 맏며느리를 세워놓는 것은 조왕신의 힘을 빌려서 비를 내리게 하려는 것이다.

  6. 철확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고려 초 국찰인 개태사(開泰寺)에는 스님들의 식사 마련에 사용된 철확(鐵鑊, 쇠솥)이 있다. 이 철확은 큰 홍수 때 개태사에 모신 불상을 구하였고, 이 철확과 함께 제방을 쌓으면 그 제방이 튼튼하여 수해를 막아주었고 풍년이 들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 솥으로 지은 밥을 먹은 군사들이 모두 잘 싸워 왜군들을 물리쳤다. 이 솥에 원한이 맺힌 왜군들이 솥을 옮겨 가려고 하였으나 그 순간 이 때에 천둥과 번개가 쳐서 옮겨 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철확은 대홍수 때 떠내려가서 연산면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혀 있었다. 그 후로 승려들에게 원성살 일이 생기고 마을에도 흉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이 철확을 발굴하여 연산공원에 옮겨 놓았다가 다시 개태사 경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철확의 솥뚜껑 역시 홍수 때 떠내려가 논배미에 묻혔다. 그 후로 고을 원님이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무고한 백성을 문초하면 웅덩이에서 소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고 한다. 솥뚜껑을 찾으려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땅을 파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금산사 미륵불이 왕의 상징인 솥 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의의

솥은 단순히 음식물을 조리하는 용기의 기능을 뛰어넘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였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권의 상징이었으며, 종교적 의기나 죽은 자의 식량을 담아 놓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서민들 사이에서 솥은 집안의 재물을 솥 신앙 또는 조왕의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 모셔졌다. 솥 역시 조왕신처럼 제액초복, 정화력 등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솥은 집안의 우환을 제거하거나 좋은 일에 생길지도 모를 액을 막는 데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솥은 부엌에서 사용되는 다른 용구들과 달리 설치할 때도 길한 날짜를 선택했다. 또 시체 등 부정한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솥뚜껑 위에 밥주걱이나 칼 등을 올려놓으면 조왕신이 노한다 하여 금기시하였다.

참고문헌

조왕신앙연구 (신영순,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솥과 민속 (신영순, 생활용구 6․7, 민속원, 1998)
三國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겨레과학기술조사연구 Ⅺ (국립중앙과학관, 2003)
삼국∼고려시대 솥[釜]의 전개양상 (정종태, 금강고고, 충청문화재연구원, 2005)

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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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일 2016-10-31

정의

날것을 익힐 때 사용하는 주방용구. 밥을 짓거나 국 또는 물을 끓이는 데 사용한다. 주로 무쇠로 만들어 ‘무쇠솥’이라 하고, 부엌에서 가장 큰솥을 ‘조왕솥’이라고 부른다. 솥은 한자로 ‘정(鼎)’이나 ‘부(釜)’로 표기한다. 『우공(禹貢)』에 따르면 솥은 하(夏)의 우왕(禹王)이 주조한 9개의 정(鼎)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鼎)은 음식을 조리하는 용도뿐만 아니라 왕권, 국가, 제업(帝業)의 뜻을 지님으로써 신성시하였다.

역사

고대 사회에서 솥은 단순히 음식물을 조리하는 물리적인 용기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로서 왕권, 힘, 국가, 제업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공신들의 공적을 기록하거나 부정한 관리를 처벌하는 형구, 종교적 의기(儀器)나 죽은 자의 식량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동주(東周) 이래 술잔[爵], 술그릇[尊], 청동솥[鼎]이 왕권의 상징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효무본기」를 보면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복희가 만든 신정(神鼎)은 통일과 천지 만물의 귀결을 의미하였고, 황제가 만든 보정 세 개는 천․지․인을 상징하였다. 하의 우왕은 전국 구주(九州, 9부족)의 금속을 모아서 구정(九鼎)을 주조하게 하였다. 이를 소유하는 자는 곧 천자로 여겼다.”고 하였다.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보면 “기원전 606년에 초(楚)의 장왕(莊王)은 주나라 국경 지역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천자가 보낸 대부 왕손만에게 천자가 가지고 있는 솥의 크기를 물어보았다. 이에 왕손만은 임금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을지라도 무거워 옮기기 어렵고, 그 덕이 비뚤어지고 어리석으면 비록 크다 해도 가벼워서 옮기기 쉽다고 하였으며, 주나라의 천명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솥의 무게를 물어 천자의 자리를 엿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주나라에는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나라에서 감히 북방(北方)을 엿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왕의 덕을 솥의 크기와 비교하고 왕권의 강대함을 솥의 무게로 표현함으로써 솥을 왕권의 상징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힘이 장사인 진나라 무왕은 기원전 307년 8월 맹설(孟說)이라는 장사와 솥을 들어올려 서로 힘을 겨루었다. 그러나 이를 들어 올리던 무왕은 경골(정강이뼈)이 부러져 이로 인해 얼마 후 죽게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를 보면 “42년 겨울 12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부여를 치러 가다가 비류수 옆에 이르러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그 솥에 밥을 짓게 하였더니 불을 때기 전에 저절로 열이 나서 밥이 다 되어 군사 전체를 배부르게 먹일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웬 건장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이 솥은 우리집 물건으로 나의 누이가 잃었는데 지금 왕께서 얻었으니 청컨대 제가 솥을 지고 왕을 따라 가겠습니다.’ 하므로 그에게 부정(負鼎)이라는 성(姓)을 주었다. …(중략)… 밤에 탈출하다가 골구천에서 얻은 신비로운 말과 비류수 상류에서 얻은 큰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서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군사들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사례를 통해 솥이 힘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솥의 소유 여부는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어 한 나라의 군사력, 힘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고국천왕조에서는 “왕의 신장은 9척이고, 자태와 표정이 씩씩하고 뛰어나며, 힘이 능히 솥을 들 만하였고(上王身長九尺姿表雄偉力能扛鼎蒞事聽斷寬猛得中)”라 하여 고국천왕이 힘이 세다는 내용을 솥을 들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 보장왕 2년에는 개금이라는 사람이 솥의 다리가 세 개인 것처럼 나라에는 세 가지의 종교, 즉 유교․불교․도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받아들이기도 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에서는 “어떤 스님이 절을 지을 철물을 구하자 어머니는 철솥으로 시주하였다. 이 일을 진정에게 알리자 진정은 기뻐하며 질그릇 동이로 솥을 삼아서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솥이 집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1권 총서(總序) 30번째 기사를 보면 “8월에 수양대군의 잠저(潛邸) 가마솥이 스스로 소리 내어 울었다. 잠저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의혹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옛글에도 있으니 이는 잔치를 베풀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무당 가운데 비파(琵琶)라고 불리는 자가 있었다. 그가 급히 달려와서 청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를 알현하고 ‘이는 대군(大君)께서 39세에 등극(登極)하실 징조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대비가 놀라서 물으려고 할 때 무당은 더 고하지 않고 갔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솥은 왕의 계승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라의 건국이나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의 치적을 솥과 종에 새겨 후대에 기리게 하였다. 이 밖에 솥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를 처벌하는 형구, 사찰에서는 불사리를 넣어두는 도구 등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서도 솥을 드는 것을 삼군 갑사를 뽑는 기준으로 삼아서 힘의 경중을 비교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은 커대란 월대 위에 앉혀져 있다. 월대는 국가의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상하 두 단으로 된 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계단을 두었다. 여기에 왕권을 상징하는 솥[鼎]이 있다. 이 솥은 배가 둥글고, 다리가 셋이며, 귀가 둘이다. 솥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고 하늘의 복을 기원하는 상징물로도 쓰였다.

형태

솥은 음식물을 조리하는 도구로서 시대에 따라 돌, 토기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주철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청동솥, 무쇠솥 등이 만들어지면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솥은 냄비와 달리 밑의 두께가 두꺼워서 음식이 잘 타지 않으며, 부엌의 부뚜막에 걸고 음식을 조리하게 만들어졌다. 솥의 밑은 그다지 우묵하지 않고 약간 편평한 편이다. 솥은 크게 정(鼎), 부(釜), 노구(鑪口) 세 가지로 나뉜다. 부는 큰 가마이다. 다리가 없고 밑이 약간 둥글되 옆은 편평하고 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었다. 정은 다리가 달려 있고, 대․중․소 세 가지로 구분하며, 옆이 넓고, 밑과 뚜껑이 거의 같은 모양으로 둥글다. 노구는 놋쇠나 구리쇠로 만든 솥으로, 자유로이 걸었다가 떼었다가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밖에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섬용지(贍用志)」 취류팽약지기편(炊餾烹瀹諸器篇)에는 “옛날에는 다리가 있으면 기(錡)라 하고 없으면 부(釜)라 하였다. 대구(大口)는 부(釜), 소구(小口)는 복(鍑)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정과 기는 세 발[다리]이 있는 솥이며, 부와 복은 다리가 없다. 또한 솥의 크기에 따라 ‘서말치’․‘두말치’․‘외말치’, 기능에 따라 ‘밥솥’․‘국솥’․‘찬솥’으로 각각 구분한다.

내용

전근대사회의 일반 서민들에게 솥은 가족의 안녕과 가정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불씨와 동일시되었다.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맏며느리에게 물려주듯, 부뚜막에 걸린 세 개의 솥 가운데 중앙에 있는 밥솥은 언제나 맏며느리가 관리하였다고 한다. 또한 ‘솥단지를 뗀다’고 하면 그 집안 전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감을 의미한다.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할 때에도 가장 먼저 서두르는 일이 ‘솥을 거는 일’이었다. 길일을 택하여 솥을 걸고 그날 밤 그 집에서 자고 나면 설령 살림살이를 옮겨가지 않아도 이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다. 솥에 대한 관념은 전근대사회로 갈수록 더욱 강하다. 신혼 초에 새댁이 음식을 조리하다가 솥뚜껑을 깨면 소박을 놓아 친정으로 돌려보냈으며, 아기를 낳아 처음으로 바깥에 나갈 때 솥을 쓰고 나가면 나쁜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솥을 장[市場]이나 대장간 등에서 사와 부뚜막에 설치할 때에는 길한 날과 시간을 보고 손 없는 날에 걸어야 한다. 길일에 솥을 걸지 않으면 동티가 나서 집안 식구가 아프다고 한다. 손 있는 날은 1일과 2일은 동쪽, 3일과 4일은 서쪽, 5일과 6일은 남쪽, 7일과 8일은 북쪽이다. 손 없는 날은 9일과 10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솥은 조왕신앙과 관련해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로 인식되어 많은 금기가 따른다. 이러한 금기를 통해 일반 서민들의 솥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솥은 중요한 조리도구이기 때문에 집안의 기둥인 주인 남자와 자식의 신변, 집안의 경제, 가족의 질병 등과 관련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게 하였다. 또한 음식을 만드는 도구이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게 보관하기 위해 관이나 시신이 있는 장소에 두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전근대사회 사람들의 위생관념을 엿볼 수 있다.

지역사례

전통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은 솥을 재신(財神)으로 모시고 솥씀과 소댕(솥뚜껑)꼭지 밟기, 솥찜질, 예언, 풍농 점치기 등과 같이 솥과 관련한 다양한 풍습이 행해졌다. 솥신앙일반 서민들은 솥을 가족의 안녕이나 가정의 운명과 관련이 깊은 재물신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 사례를 전국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제주도지역에서만 사례가 발견된다. 제주도지역에서는 이 신이 집안에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송씨 집안에서는 집안 할머니가 물질[潛水作業]을 매우 잘했다. 하루는 바다에 갔다가 뚜껑이 없는 솥을 주워와 집에 와서 물을 끓였다. 그러나 종일 불을 땠음에도 물은 끓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 솥 안에서 할머니가 나타나 자기를 잘 위하면 자손들 벼슬도 시켜주고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 뒤 그 귀신을 잘 위했더니 자손들이 서귀진 조방장, 명월만호 시의원, 대정원(大靜院) 등을 지내고 부자로 잘살았다. 그 후로 솥할머니를 고팡(곳간)에 안칠성으로 모시고 명절 제사 때마다 메를 올리게 되었다. 송씨와 그 집안 딸들이 시집가면서 솥신앙이 번졌다. 표선면 성읍리 강씨 집안의 강선달네가 옛날 솥할망이 도와서 부자가 되어 잘살았다고 한다. 하루는 강선달이 바다에 갔다가 큰 무쇠솥 하나가 개맡(포구)으로 올라온 것을 발견하였다. 강선달은 그것을 주워와서 밥을 하고자 검불로 불을 땠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물은 끓지 않았다. 화가 난 강선달은 고팡으로 솥을 내동댕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서 “난 솥할머니이니 나를 잘 위하면 말로 섬으로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 뒤 제사 때마다 부엌에 밥 한 그릇을 차려 위하였더니 강선달은 삽시간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 후에는 굿을 할 때 ‘솥할망 군웅’으로 놀리고, 딸들이 시집을 가면 이 신이 쫓아간다고 한다. 이 두 집안의 솥신앙을 살펴보면 솥신과 솥귀신할망은 제주도 송씨와 강씨 집안에서만 모셔졌다. 그러다가 두 집안의 딸들이 다른 지역으로 시집가면서 전파된 것이다. 육지부에서는 제주도와 같이 독립된 신령으로 솥신을 모시지는 않지만 조왕신이나 조왕의 기능을 하는 하나의 도구로 섬기고 있다. 솥신이 제주도에서 재물신으로 모셔지는 것은 육지부와 달리 제주도 같은 섬지역에서는 솥이 구하기 어려운 물건으로 인식되어 솥을 ‘부의 상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재물과 관련하여 ‘평소에 밥솥에 물을 부어놓지 않으면 재물이 마른다.’는 속담도 전하고 있다. 솥씀과 소댕(솥뚜껑)꼭지 밟기제주도지역에서는 ‘아기를 낳고 처음으로 바깥에 나갈 때 솥을 쓰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솥씀’ 풍속을 의미한다. 솥씀 풍속은 아기를 낳은 지 3~4개월 되어 처음으로 집 밖에 나가게 될 때 부정을 탈까 봐 뱅이(액막이)하는 것을 말한다. 솥을 쓴다는 것은 아기의 이마와 콧등에 솥밑 검댕을 바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나들이 할 때 솥밑 검댕을 바르고 나가면 솥밑 검댕에 관심이 쏠려 다른 사람들이 아기에게 부정한 말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솥밑 검댕을 바르는 풍습은 함을 팔 때도 이루어진다. 혼례 전 함진아비가 함을 팔기 위해 정방을 나설 때 얼굴에 솥밑 검댕을 칠한다. 이것은 불에 의해 만들어진 검댕과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조리하는 솥에 불[火]과 같은 제액초복의 기능이 있어 재앙과 액운을 막아 주고 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부는 혼례식 후 신행길에 오르기 전에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세 번 들썩거려 소리를 낸다. 이는 새로운 삶과 신행길에 있을 액을 막아 달라는 의미이다. 솥은 여성의 주된 생활도구이기 때문에 솥과의 헤어짐은 그 집안 전체와의 분리(分離)를 뜻한다. 신부는 처음으로 시댁[媤家]에 들어갈 때 출입문 문지방 앞에 솥뚜껑을 놓아 밟고 들어가거나 안방 문턱 앞에 솥뚜껑을 엎어 놓고 가마채를 그 앞에 이르게 한 다음 신부가 내리면서 왼발로 솥뚜껑을 디디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간택(揀擇)할 때 궁 안쪽 문지방 바로 앞에 큼직한 가마솥 뚜껑을 엎어놓고 처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그 솥뚜껑 꼭지를 딛고 대궐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문지방은 공간과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문지방 앞에 솥뚜껑을 놓고 밟게 하는 것은 신행길에 따라왔을지도 모를 잡귀와 액을 정화시켜 새로 시작하는 삶이 복되기를 비는 것이다. 이는 신부가 시댁에 들어갈 때 대문 양옆에 짚불을 놓아 신부에게 붙어서 왔을지도 모를 액을 정화시키고 복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왜 왼발로 솥뚜껑을 디디게 하고 소댕의 꼭지를 밟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밖에 환갑이 든 해에는 생일날 부엌의 솥 앞뒤를 돌려놓고 밥을 해 먹으면 아무런 탈이 없다고 한다. 솥찜질솥찜질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한제국 말까지 각 지방의 큰 네거리에는 부정한 관리를 처벌하는 형구로써 솥과 부뚜막이 있었다고 한다. 솥찜질은 사람을 솥에 넣고 삶아 죽이는 시늉만 하는 공개처벌이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 솥을 이용하여 벌을 주는 것을 ‘솥찜질’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따금 서울 종로 네거리에 큰 솥을 걸어 놓고 부정을 저지른 관리를 솥 안에 들어가게 하였다. 죄인이 솥에서 나올 때 그는 주검 시늉을 하며, 형관에게 다른 이름을 받는다. 가족들은 살아 있는 시신을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 격식을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그러는 동안 살아있는 시신은 진짜 시신처럼 취급되어 평생 동안 격리된 채 살아간다.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도 금지되고,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된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면 주모는 망인에게 술을 판 것으로 여겼고, 그의 아내가 임신하면 과부가 애를 가졌다고 비웃었다. 큰 고을마다 솥찜질의 형벌을 시행하기 위해 큰 부뚜막과 솥이 네거리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솥찜질은 나라에서 사람을 솥에 넣고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시행하다가 사회가 명분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변화되면서 팽형을 다른 형태의 형벌로 변경시킨 것으로 보인다. 즉 솥찜질은 죄인을 솥에 넣고 삶아 죽이는 시늉만 하여 목숨은 살려 주되 그의 인격과 사회성을 박탈하는 명예형의 형벌이었다. 그런 이후에 이 형벌은 팽형이 아닌 우리말인 ‘솥찜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부정부패한 관리에게 가하는 불문율의 제재관습형(制裁慣習刑)으로 전해진 듯하다.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관리를 처벌하는 관습이 어떠한 연유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또 솥찜질이라는 불문율의 제재관습형이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다만 대한제국 말까지 이루어졌다는 솥찜질은 팽형이 이루어진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솥 울음솥에 음식물을 찌거나 삶을 때 솥이 ‘부웅부웅’ 하고 울거나 소댕(솥뚜껑)이 들썩거려 김이 새어 나오거나 솥이 깨지는 꿈을 꾸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징조라고 여겼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밥솥이 울면 주인 남자가 부엌 안으로 들어가 앉고 아내가 남편에게 절을 하였고, 국솥이 울면 남편이 아내에게 절을 하면서 울음멎기를 바랐다고 한다. 또한 꿈에 솥이 깨지면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한다. ‘매일 정성 들여 밥하고 기일제사 때 메를 하여 조상을 위하는 솥이 깨졌으니 나쁘다.’는 제주도의 말이 이를 반영해 준다. 또한 『천문지(天文志)』의 맨 앞에는 솥별[鼎星]이 나온다. 이 별의 동태를 살펴서 이 별이 흔들려 보이면 나라가 불안하다고 한다. 솥을 나라의 신기(神器)로 여기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조에서 수양대군이 잠저에 있을 때 잠저의 가마솥이 스스로 울어 ‘이는 잔치를 베풀 징조이다.’라 하고 비파라는 무당이 대왕대비에게 “대군이 서른아홉 살에 등극하실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홍만선(洪萬選) 역시 『산림경제(山林經濟)』 권1 「복거」편에서 “솥이 우는 것은 시루[甑]가 비어 있어 기운이 차면 우는데 괴이할 것은 없으나 덮개를 열어 놓으면 즉시 그친다. 이것은 재앙이 되지 않으나 모름지기 남자가 여자 절을 하거나 여자가 남자 절을 하면 즉시 그친다. 또는 귀신의 이름인 파녀(婆女)만을 불러도 재앙이 되지 않고 문득 이로운 실익[吉利]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솥이 우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예측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나쁜 일만을 예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솥은 신성(神聖)을 지닌 신기로운 도구기 때문에 나라, 마을 공동체, 개인에게 앞으로 일어날 중요한 일에 대해 예언적 기능을 한다고 전통사회의 사람들은 믿었다. 솥 기우제날이 가물면 솥뚜껑을 이용하여 기우제를 지내면서 아들을 많이 낳은 맏며느리를 불에 달군 소댕(솥뚜껑) 위에 세워 놓고 키에 담은 물을 끼얹으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이때 사용하는 소댕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가장 중요한 솥의 소댕, 즉 조왕솥의 뚜껑이다. 기우제 때 조왕솥의 뚜껑 위에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아들을 많이 낳은 맏며느리를 세워놓는 것은 조왕신의 힘을 빌려서 비를 내리게 하려는 것이다. 철확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고려 초 국찰인 개태사(開泰寺)에는 스님들의 식사 마련에 사용된 철확(鐵鑊, 쇠솥)이 있다. 이 철확은 큰 홍수 때 개태사에 모신 불상을 구하였고, 이 철확과 함께 제방을 쌓으면 그 제방이 튼튼하여 수해를 막아주었고 풍년이 들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 솥으로 지은 밥을 먹은 군사들이 모두 잘 싸워 왜군들을 물리쳤다. 이 솥에 원한이 맺힌 왜군들이 솥을 옮겨 가려고 하였으나 그 순간 이 때에 천둥과 번개가 쳐서 옮겨 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철확은 대홍수 때 떠내려가서 연산면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혀 있었다. 그 후로 승려들에게 원성살 일이 생기고 마을에도 흉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이 철확을 발굴하여 연산공원에 옮겨 놓았다가 다시 개태사 경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철확의 솥뚜껑 역시 홍수 때 떠내려가 논배미에 묻혔다. 그 후로 고을 원님이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무고한 백성을 문초하면 웅덩이에서 소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고 한다. 솥뚜껑을 찾으려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땅을 파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금산사 미륵불이 왕의 상징인 솥 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의의

솥은 단순히 음식물을 조리하는 용기의 기능을 뛰어넘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였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권의 상징이었으며, 종교적 의기나 죽은 자의 식량을 담아 놓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서민들 사이에서 솥은 집안의 재물을 솥 신앙 또는 조왕의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 모셔졌다. 솥 역시 조왕신처럼 제액초복, 정화력 등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솥은 집안의 우환을 제거하거나 좋은 일에 생길지도 모를 액을 막는 데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솥은 부엌에서 사용되는 다른 용구들과 달리 설치할 때도 길한 날짜를 선택했다. 또 시체 등 부정한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솥뚜껑 위에 밥주걱이나 칼 등을 올려놓으면 조왕신이 노한다 하여 금기시하였다.

참고문헌

조왕신앙연구 (신영순,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솥과 민속 (신영순, 생활용구 6․7, 민속원, 1998)三國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겨레과학기술조사연구 Ⅺ (국립중앙과학관, 2003)삼국∼고려시대 솥[釜]의 전개양상 (정종태, 금강고고, 충청문화재연구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