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한자명

石戰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정승모(鄭勝謨)
갱신일 2016-11-07

정의

개천이나 넓은 가로(街路) 등의 지형을 경계 삼아 수백 보 거리를 두고 일대의 주민들이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서로 돌을 던져 누가 먼저 쫓겨 달아나느냐의 여부에 따라 승부(勝負)를 가리는 전통사회의 집단놀이. 편전[便戰, 邊戰]·석전놀이[石戰戱]·돌팔매놀이[石擲戱]라고도 한다.

유래

『수서(隋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해마다 연초에 패수(浿水, 대동강)가로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은 요여(腰輿)를 타고 나아가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차례 하다가 그친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44 「세가(世家)」44에는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격구(擊毬)와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고 하였고, 「열전(列傳)」47에는 우왕(禑王) 6년(1380)에 임금이 석전놀이를 관람하기를 원했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모두 5월 단오(端午)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중기에 이르도록 석전은 단오 행사로 나온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년 5월 5일에 의하면 “국속(國俗)에 5월 5일에 넓은 가로(街路)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석전(石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3년 5월 3일에는 “상왕(태종)이 병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보내어 석전할 사람 수백 명을 모집하여 좌우대(左右隊)로 나누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때는 의금부에서 단오 석전놀이를 금하였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등 종친(宗親)들이 이 놀이를 관전(觀戰)하였을 뿐 아니라 독전(督戰)하였다고 하여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권30 4년 5월 6일에 보면 성종 때도 역시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곧 이 놀이가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행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 권18, 명종 10년(1555) 5월 27일에 왜변(倭變)이 일어났는데, 임금이 왜구를 진압할 방책을 의논하던 중 석전꾼[石戰軍]으로 김해(金海) 사람 100명을 뽑아 보낸 것처럼 안동(安東) 사람들을 뽑아 방어하게 하자는 대책이 나왔다.

조선 후기 이후 석전놀이는 단오 행사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로 옮겨졌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17 47년 11월 18일에 임금이 평양(平壤)에서 상원일(上元日), 즉 정월 대보름에 벌이는 석전을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서울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元日)에 벌이는 석전도 포청에 분부해서 못하게 할 것을 하교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제재 속에 석전놀이가 중지된 곳도 있고 그 규모도 광역의 단위에서 일부 마을 단위 행사로 축소되었다가 해방 이후 점차 사라졌다.

내용

일년 중 석전이 행해지던 시기는 대개 정월 대보름날 밤이고 다음날인 16일에 행하는 지역도 있다. 김해 지역에서는 5월 단오에 행하는데, 이색(李穡)의 『목은선생문집(牧隱先生文集)』이나 『고려사』 신우조(辛禑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명종(明宗) 때까지 석전이 단오행사의 하나로 나와 조선후기 이후 단오 행사가 쇠퇴하면서 차차 정월 대보름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서울 주변에서 벌어진 석전에 관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삼문(三門), 즉 남대문, 서대문 및 그 중간의 서소문 밖의 주민들과 아현(阿峴) 주민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던지며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만리동 고개 위에서 접전하는 모양을 하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이라고 하며 변두리로 도망가는 편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속설에 삼문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산과 마포에 사는 소년들 중에는 패를 지어 와서 아현 편을 돕는다. 바야흐로 싸움이 한창 심해지면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가 되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거나 상처가 나도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명을 보상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돌이 무서워 피하고, 금지시켜야 하는 관에서 특별히 이를 금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본받아 종각 거리나 지금의 종로 3가에 있던 비파정(琵琶亭)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고 성 밖에서는 만리현과 우수현(雨水峴, 즉 현재의 남대문 밖 도동 부근)에서 주로 편싸움을 하였다.”고 하여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경북 안동지방의 풍속 중에는 매년 정월 16일에 주민들이 읍내 복판을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삼아 좌우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하며 싸워 승부를 결정했다. 황해도와 평안도지방의 풍속에도 정월 대보름날 돌팔매질하는 놀이가 있다.

의의

석전은 용맹스러운 우리 민족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유래 깊은 민족 고유의 집단놀이다. 전쟁 등 유사시에는 석전꾼들이 동원되어 큰 활약을 하였다. 놀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우환을 떨칠 수 있었고 한 해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질병이 없기를 기원하였다.

기타

중국 대만성(臺灣省) 동항(東港) 일대의 한족들도 석전놀이를 하였는데 시기는 매년 5월 5일이었다.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에 가장 흥했고 지금은 희미해졌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國歲時記, 明宗實錄, 牧隱先生文集, 成宗實錄, 隋書, 新增東國輿地勝覽, 英祖實錄, 拙翁集, 太宗實錄
石戰考 (孫晉泰, 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中國民族節日大全 (高占祥 主編, 知識出版社, 1993)
歲時關聯 記錄들을 통해 본 조선시기 歲時風俗의 變化 (鄭勝謨, 역사민속학13, 한국역사민속학회, 2001)

석전

석전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정승모(鄭勝謨)
갱신일 2016-11-07

정의

개천이나 넓은 가로(街路) 등의 지형을 경계 삼아 수백 보 거리를 두고 일대의 주민들이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서로 돌을 던져 누가 먼저 쫓겨 달아나느냐의 여부에 따라 승부(勝負)를 가리는 전통사회의 집단놀이. 편전[便戰, 邊戰]·석전놀이[石戰戱]·돌팔매놀이[石擲戱]라고도 한다.

유래

『수서(隋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해마다 연초에 패수(浿水, 대동강)가로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은 요여(腰輿)를 타고 나아가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차례 하다가 그친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44 「세가(世家)」44에는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격구(擊毬)와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고 하였고, 「열전(列傳)」47에는 우왕(禑王) 6년(1380)에 임금이 석전놀이를 관람하기를 원했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모두 5월 단오(端午)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중기에 이르도록 석전은 단오 행사로 나온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년 5월 5일에 의하면 “국속(國俗)에 5월 5일에 넓은 가로(街路)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석전(石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3년 5월 3일에는 “상왕(태종)이 병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보내어 석전할 사람 수백 명을 모집하여 좌우대(左右隊)로 나누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때는 의금부에서 단오 석전놀이를 금하였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등 종친(宗親)들이 이 놀이를 관전(觀戰)하였을 뿐 아니라 독전(督戰)하였다고 하여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권30 4년 5월 6일에 보면 성종 때도 역시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곧 이 놀이가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행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 권18, 명종 10년(1555) 5월 27일에 왜변(倭變)이 일어났는데, 임금이 왜구를 진압할 방책을 의논하던 중 석전꾼[石戰軍]으로 김해(金海) 사람 100명을 뽑아 보낸 것처럼 안동(安東) 사람들을 뽑아 방어하게 하자는 대책이 나왔다. 조선 후기 이후 석전놀이는 단오 행사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로 옮겨졌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17 47년 11월 18일에 임금이 평양(平壤)에서 상원일(上元日), 즉 정월 대보름에 벌이는 석전을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서울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元日)에 벌이는 석전도 포청에 분부해서 못하게 할 것을 하교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제재 속에 석전놀이가 중지된 곳도 있고 그 규모도 광역의 단위에서 일부 마을 단위 행사로 축소되었다가 해방 이후 점차 사라졌다.

내용

일년 중 석전이 행해지던 시기는 대개 정월 대보름날 밤이고 다음날인 16일에 행하는 지역도 있다. 김해 지역에서는 5월 단오에 행하는데, 이색(李穡)의 『목은선생문집(牧隱先生文集)』이나 『고려사』 신우조(辛禑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명종(明宗) 때까지 석전이 단오행사의 하나로 나와 조선후기 이후 단오 행사가 쇠퇴하면서 차차 정월 대보름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서울 주변에서 벌어진 석전에 관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삼문(三門), 즉 남대문, 서대문 및 그 중간의 서소문 밖의 주민들과 아현(阿峴) 주민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던지며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만리동 고개 위에서 접전하는 모양을 하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이라고 하며 변두리로 도망가는 편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속설에 삼문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산과 마포에 사는 소년들 중에는 패를 지어 와서 아현 편을 돕는다. 바야흐로 싸움이 한창 심해지면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가 되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거나 상처가 나도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명을 보상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돌이 무서워 피하고, 금지시켜야 하는 관에서 특별히 이를 금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본받아 종각 거리나 지금의 종로 3가에 있던 비파정(琵琶亭)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고 성 밖에서는 만리현과 우수현(雨水峴, 즉 현재의 남대문 밖 도동 부근)에서 주로 편싸움을 하였다.”고 하여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경북 안동지방의 풍속 중에는 매년 정월 16일에 주민들이 읍내 복판을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삼아 좌우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하며 싸워 승부를 결정했다. 황해도와 평안도지방의 풍속에도 정월 대보름날 돌팔매질하는 놀이가 있다.

의의

석전은 용맹스러운 우리 민족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유래 깊은 민족 고유의 집단놀이다. 전쟁 등 유사시에는 석전꾼들이 동원되어 큰 활약을 하였다. 놀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우환을 떨칠 수 있었고 한 해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질병이 없기를 기원하였다.

기타

중국 대만성(臺灣省) 동항(東港) 일대의 한족들도 석전놀이를 하였는데 시기는 매년 5월 5일이었다.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에 가장 흥했고 지금은 희미해졌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國歲時記, 明宗實錄, 牧隱先生文集, 成宗實錄, 隋書, 新增東國輿地勝覽, 英祖實錄, 拙翁集, 太宗實錄石戰考 (孫晉泰, 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中國民族節日大全 (高占祥 主編, 知識出版社, 1993)歲時關聯 記錄들을 통해 본 조선시기 歲時風俗의 變化 (鄭勝謨, 역사민속학13, 한국역사민속학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