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수

한자명

石獸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변혜민(邊慧敏)
갱신일 2016-10-17

정의

능묘 주위에 세워두는 돌로 만든 동물 모양의 상像.

역사

『금석례金石例』의 기록에 따르면, 능묘 주위에 석조물을 배치하는 가장 오래된 예는 중국 전한대前漢代의 장수 곽거병霍去病의 묘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석조물을 조성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수石獸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진묘수鎭墓獸로,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수호동물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묘 주위에 석사자石獅子를 세우거나 둘레 호석으로 십이지상十二支像을 배치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에서 점차 벗어나, 고려 말 공민왕대에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석양石羊・석호石虎 등이 배치되는 모습으로 바뀌어 조선시대에 이른다.

내용

조선시대 왕릉에는 상설제도象設制度라 하여 능묘를 수호하고 왕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세우는 석인石人, 석수, 석망주石望柱, 장명등長明燈 등의 배치를 정하고 있는데, ‘상설’이라 함은 앞에 나열한 석물들을 말한다. 대개 능에 호석을 두르고 그 주위에 각각 4마리의 석양, 석호를 서로 엇바꾸어 배치하여 밖을 향해 능을 수호하는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능의 좌우에 무인석이 1~2쌍, 이보다 한 단 더 높은 곳에 문인석이 1~2쌍이 있으며, 이들 뒤엔 석마石馬가 서 있다.

많은 동물 중 호랑이나 양을 무덤 주위를 지키는 석수로 세운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묘를 파고 시체를 해치는 여우의 해를 막기 위해 석호石虎를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석양石羊의 경우, 공자의 석전대제에서 양머리를 사용하였을 정도로 양은 유교의 대표적인 희생 제물이었고, 이후에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시하는 영물이자 성수聖獸로 생각되었으므로, 석양이 무덤을 수호하는 역할로 능묘 주위를 지키게 된 것이다.

석수를 세우는 것에 대한 법률은 따로 정해져 있지않았지만, 사안이 생길 때마다 금지하거나 허용 기준을 제시하였다. 석수는 본래 왕의 무덤에만 세울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왕 이외의 다른 무덤에 석수를 세울 경우, 이를 금지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세종실록』의 성비誠妃의 묘소에 석수를 세우는 것에 대한 의논과 『성종실록』의 왕실 종친의 묘소에 석수를 세운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그 예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사대부의 묘에도 석수, 특히 석양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조대학자인 이규상李圭象(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彥錄』에 의하면 영조 말년부터 사대부집 묘에 석인을 세우지 않게 된 것은 효종의 사위였던 금평도위錦平都尉 박필성朴弼成(1652~1747) 집안의 묘역에 세워진 석인이 제사 음식을 가로채 버린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한다. 그래서 석인을 넘어뜨리고 석양을 대신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금평도위 집안이 당대의 명문가라 이를 본떠 다른 집안에서도 따라하게 되면서 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특징 및 의의

석수는 무덤의 주인을 향한 후손들의 염원과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또한, 비교적 제작연대가 뚜렷하여 한 시대의 조각의 아름다움과 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국역 가례증해4(한국고전의례연구회, 민속원, 2011), 문화로 읽는 십이지신 이야기 양(이어령 외, 열림원, 2012), 서울 경기지역의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연구(김우림,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십이지의 문화사(허균, 돌베개, 2010), 조선시대 금관조복형 문인석 연구(최윤정, 한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조선시대 왕릉 석수에 대한 연구(배윤수,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조선시대 왕릉의 석인 석수 조형성연구(신광철,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석수

석수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변혜민(邊慧敏)
갱신일 2016-10-17

정의

능묘 주위에 세워두는 돌로 만든 동물 모양의 상像.

역사

『금석례金石例』의 기록에 따르면, 능묘 주위에 석조물을 배치하는 가장 오래된 예는 중국 전한대前漢代의 장수 곽거병霍去病의 묘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석조물을 조성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수石獸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진묘수鎭墓獸로,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수호동물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묘 주위에 석사자石獅子를 세우거나 둘레 호석으로 십이지상十二支像을 배치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에서 점차 벗어나, 고려 말 공민왕대에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석양石羊・석호石虎 등이 배치되는 모습으로 바뀌어 조선시대에 이른다.

내용

조선시대 왕릉에는 상설제도象設制度라 하여 능묘를 수호하고 왕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세우는 석인石人, 석수, 석망주石望柱, 장명등長明燈 등의 배치를 정하고 있는데, ‘상설’이라 함은 앞에 나열한 석물들을 말한다. 대개 능에 호석을 두르고 그 주위에 각각 4마리의 석양, 석호를 서로 엇바꾸어 배치하여 밖을 향해 능을 수호하는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능의 좌우에 무인석이 1~2쌍, 이보다 한 단 더 높은 곳에 문인석이 1~2쌍이 있으며, 이들 뒤엔 석마石馬가 서 있다. 많은 동물 중 호랑이나 양을 무덤 주위를 지키는 석수로 세운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묘를 파고 시체를 해치는 여우의 해를 막기 위해 석호石虎를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석양石羊의 경우, 공자의 석전대제에서 양머리를 사용하였을 정도로 양은 유교의 대표적인 희생 제물이었고, 이후에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시하는 영물이자 성수聖獸로 생각되었으므로, 석양이 무덤을 수호하는 역할로 능묘 주위를 지키게 된 것이다. 석수를 세우는 것에 대한 법률은 따로 정해져 있지않았지만, 사안이 생길 때마다 금지하거나 허용 기준을 제시하였다. 석수는 본래 왕의 무덤에만 세울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왕 이외의 다른 무덤에 석수를 세울 경우, 이를 금지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세종실록』의 성비誠妃의 묘소에 석수를 세우는 것에 대한 의논과 『성종실록』의 왕실 종친의 묘소에 석수를 세운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그 예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사대부의 묘에도 석수, 특히 석양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조대학자인 이규상李圭象(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彥錄』에 의하면 영조 말년부터 사대부집 묘에 석인을 세우지 않게 된 것은 효종의 사위였던 금평도위錦平都尉 박필성朴弼成(1652~1747) 집안의 묘역에 세워진 석인이 제사 음식을 가로채 버린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한다. 그래서 석인을 넘어뜨리고 석양을 대신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금평도위 집안이 당대의 명문가라 이를 본떠 다른 집안에서도 따라하게 되면서 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특징 및 의의

석수는 무덤의 주인을 향한 후손들의 염원과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또한, 비교적 제작연대가 뚜렷하여 한 시대의 조각의 아름다움과 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국역 가례증해4(한국고전의례연구회, 민속원, 2011), 문화로 읽는 십이지신 이야기 양(이어령 외, 열림원, 2012), 서울 경기지역의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연구(김우림,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십이지의 문화사(허균, 돌베개, 2010), 조선시대 금관조복형 문인석 연구(최윤정, 한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조선시대 왕릉 석수에 대한 연구(배윤수,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조선시대 왕릉의 석인 석수 조형성연구(신광철,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