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윤정(金潤貞)
갱신일 2017-12-20

정의

조선시대 민간에서 생활이나 의례 공간을 장식하였고, 조선 후기 이후 경제성장으로 시장성을 확보한 후 20세기 초에는 시장을 통해 유통된 그림.

개관

‘민화民畵’라는 용어는 일본의 민예운동가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처음 사용하였다. 야나기는1929년 3월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오오츠에[大津繪]와 같은 민예적 그림을 지칭하기 위해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1937년 『공예工藝』 제73호 「공예적 회화工藝的 繪畵」 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이 글에서 ‘민중에 의해 태어나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사용된 그림’을 ‘민화’로 정의하였고 그 예로 일본의 오오츠 지방의 기념품 그림인 오오츠에와에마[繪馬] 등을 예로 들었다. 야나기의 조선민화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일본 민화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1959년 『민예民藝』 제80호의 「불가사의한 조선민화」 와 같은 책에 실린 「조선의 민화」 두 편의 글에서 구체적인 그림과 함께 조선민화를 소개하였다. 그는 어느 나라에나 “회화에는 이를테면 정통파 회화와 비정통파 회화 두 가지의 흐름이 있는데, 전자는 예술가로서 화가의 작품이며, 후자는 화공이 그리는 구매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고 서명의 유무, 감상과 실용성이라는 목적의 차이, 유일하게 한 장으로 그려지는 그림과 반복적으로 생산해 내는 그림, 창조를 본성으로 하는 그림과 민족의 전통과 연관 있는 그림 등 이른바 제도권 그림과 그렇지 못한 그림의 특징 비교를 통해 민화를 규정지었다.
야나기의 민예론은 야나기가 민예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1930년대 말 조선에도 소개되었다. 1939년 10월 『동아일보』에는 ‘조선공예의 주변周邊’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당시 조선공예의 상황과 야나기의 민예관 및 일본민예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민예에 대한 소개가 즉각적으로 있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민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고 1970~1980년대에 이르러 주목받았다. 1970년대 이후 민화는 화원이나 문인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정통회화와 달리 중국화풍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우리 민족의 생활 정서와 사상을 가식 없이 드러낸 순수한 우리 그림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조자용도 『한국민화의 멋』(브리태니커, 1972)을 통해 ‘민’을 사회적 지위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평등한 지위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민화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국인으로 돌아간 경지에서 그려낸 멋의 그림이라 하였다. 김호연은 민화에 대한 미적 경험을 바탕으로 민화를 ‘겨레그림’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을 바탕으로 민화에 대한 인식은 주제에서부터 표현양식과 색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한국인의 생활미감과 정서를 담고 있는 그림으로서 ‘진정하고 유일한’ 우리의 그림이라는 시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이후 현재까지 민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뿐 아니라 민화를 좋아하는 감상자 층이나 현재 민화풍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의 의식이나 작화 태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우환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민화의 용도에 더욱 천착하여 민화의 생활화적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하였으며, 작가로서의 인식을 곁들여 회화로서 민화를 보는 시각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우환의 시각은 이후 현대 미술작가들 가운데 색과 조형 등에 한국적인 것으로서 민화의 특징을 반영하려는 움직임에 영향을 주었다. 1980~199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한국적 사회상황과 맞물려 ‘민중’이 부각되면서 민화를 민중화로 연결시키는 담론으로 이어졌다. 이 견해는 중세 봉건사회 내부에서 이룩된 생산력 발전이 신분사회를 변화시켰고, 이러한 당시의 사회역사적 배경이 민중화로서 민화의 생산과 소비를 가능케 했다고 보았다. 민화를 봉건 사회의 해체기에 드러나는 서민의식 또는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진보적인 미술행위로 보고 민화의 조형세계를 원체풍과 같은 권위적인 제도권 미술을 해체하고자 한 저항적인 미의식의 발현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민화의 선행적 형태인 궁중화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민화로 그려진 각 주제에 대한 연구와 중국 민간년화 등 동아시아 회화의 영향에 대한 연구에 힘입어 동아시아 전반의 회화사 맥락에서 민화를 자리매김하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민화로 그려지는 그림의 주제에 대한 사적인 고찰을 통해 조선 후기 민화의 연원을 연구하고 있으며, 한반도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에 이르는 동아시아적 문화와 미술의 흐름 속에서 민화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일면 그동안 우리 회화사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던 민화를 그림 그 자체로서 회화사의 선상에 자리 잡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한편 궁궐에서 사용했던 것을 비롯해 채색장식화 전반을 민화로 확대 해석하고 이를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거나 궁중화풍의 민화를 고급민화로 별도로 분류하면서 민화에 대한 개념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막연하게 나마 민화를 서민층의 회화라고 개념 짓던 학자들조차도 민화의 대표작으로 전문화가(또는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꼽고 심지어는 왕실이나 상류층에서 화가들을 시켜 그리고 장식했던 그림 들이 대표작으로 전시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에 궁궐에서 의례와 장식용으로 사용하던 그림을 ‘궁화’로 구분해서 부르고 그 이외의 민간 수요 그림을 ‘민화’로 부르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내용

민화는 조선 후기 기복호사풍조에 따른 그림에 대한 서민층의 수요 증가 이후 크게 확산되었다. 조선 후기 시장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한 중인층의 성장으로 한양을 비롯한 도시를 중심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경제의 성장으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 늘어나면서 생활공간에 대한 치장이 유행하게 되면서 민화가 퍼져 나갔다.
19세기 후반 한양의 모습을 담은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에는 종로통 광통교 아래에서 백자도, 곽분양행락도, 십장생도, 구운몽도, 신선도 등이 병풍이나 낱장으로 제작, 유통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광통교 일대는 이미 18세기부터 서화 유통 공간이 형성되어 20세기 초까지도 그림 시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다양한 종류의 문과 벽을 장식할 그림이 판매되었다. 지전에서는 그림 그리는 이를 고용하여 그려 팔기도 하였고 도화서 화원을 비롯한 당대 유명 서화가들의 그림도 유통되었다. 이처럼 민간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던 그림들은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에서 온 이방인들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민속조사를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던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가 경상도 밀양 어느 시장에서 사가지고 간 문자도는 현재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처럼 조선에 왔던 이방인들은 개항지뿐 아니라 전국을 여행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눈에 띤 조선의 그림은 ‘도배할 때 집안을 치장했던, 집안의 방문과 벽장문에 붙어있던 그림’, ‘혼례나 제사와 같은 의례를 치를 때 의례 장소를 치장했던 그림’이었다. 20세기 초 서울 주재 이태리 총영사로 있었던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의 책에는 “종로에 복제화와 종이를 파는 거리에서 몇 전만 주면, 용이나 호랑이, 날개 돋친 말, 옛 전사들의 환상적인 형상들을 구할 수 있는데, 이것들을 문짝에 붙여 놓으면 집에서 악귀를 내쫓는다고 한다. 이들 복제화 중에는 옛 신화에 등장하는 성현들과 수호신을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방에만 사용하며 한국의 어느 집에나 같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고 하여 19세기 중반 한산거사의 글에 나오던 종로 광통교 시장의 그림 파는 곳과 같은 그림가게가 50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까지 이어지고 있음 알 수 있다.
근대기의 미술사가 윤희순尹喜淳, 1906~1947도 조선민족은 원래 벽장壁欌·두껍닫이·덧문·벽壁 등에 산수화山水畵·채화彩畵 등을 장식하기 위해 도배할 때는 으레 지전紙廛에서 소위 서화書畵 몇 장씩을 구할 줄 안다고 하여 당시의 풍속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그림치장은 주로 도배 철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면서 이뤄졌고 여기에 쓰이는 그림은 지전 등을 통해 유통된 것이다. 경기 지역의 성주풀이인 <황제풀이>에서 “도배를 한 연후에 그림치장 없을 소냐……”라고 한 것은 도배와 그림치장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1912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인쇄소인 보진재寶晋齋는 1920~1930년대 도배용 인쇄그림을 찍어내 전국에 판매하였다.
조선 민화의 가치를 일찍이 발견했던 야나기를 비롯한 일본인들도 1930년대부터 조선 민화를 활발히 수집해 현재 많은 수의 조선 민화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외국인들의 민화에 대한 관심과 수집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60년대 이후에도 일본을 비롯한 서양 각국의 방문객들이 민화를 수집해 가 현재 세계 유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상생활 공간을 장식하던 그림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화’라는 용어로 인식되고 미술품으로 수집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점차 민화에 대한 특별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민화 붐으로 연결되었다. 이 시기 사라져 가는 민속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애호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0년 5월 민예동인 최순우, 김상옥, 예용해, 이경성, 김수근이 주관한 ‘한국민예전’(1970. 5. 2~10, 신세계백화점)은 이러한 움직임이 구체화된 예이며 민예 잡지 발간도 도모하였다. 이 전시를 알리는 기사에서 민예품의 소개와 더불어 전시에 출품된 회화들을 ‘민화’라는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우리 민속과 민속품에 대한 관심이 고취되었으며 민속품 수집과 유적지 답사를 목적으로 1971년 12월 발족한 민학회도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1972년 6월에는 민학회원들의 동인지 『민학民學』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이처럼 민속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골동시장에서 ‘민화’의 인기도 높아져 1970년대에는 이미 옛 그림을 모방한 그림이나 조선 민화의 전통을 계승한 새로운 그림들이 유통될 정도였다. 인사동, 청계천, 장안동 등 서울의 골동시장은 물론이고 지방까지도 민화가 활발히 유통되었고 서양이나 일본 애호가들도 민화를 많이 수집해 갔다. 특히 야나기의 영향을 받은 일본민예운동가들의 수집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현재일본에 있는 적지 않은 양의 조선 민화들이 이 시기에 수집되어 간 것들이다.
민화는 궁정을 비롯한 상류층 수요의 그림을 모방한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주제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화목들이 유사하게 그려졌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길상벽사吉祥僻邪의 의미나 산수화, 인물화 등 역사적·문화적 은유나 상징을 담은 이야기들이 그려지는데, 민화 역시 길상 벽사적 주제부터 고사나 신화는 물론이고 산수화, 소경인물화, 사군자 같은 감상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그려지지 않은 주제가 없을 정도로 모든 화목을 포함하고 있다.
집안의 치장이나 장엄 용도의 주제들은 주로 짙은 채색화로 그려졌으며, 감상 용도의 주제들은 담채나 수묵으로도 그려졌다. 이들 가운데 사회적 요구와 취향의 유행 등의 영향으로 주로 많이 그려졌던 주제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대표적인 민화 화목들로 보인다. 문방도, 문자도, 고사인물도, 산수도, 무이구곡도, 소상팔경도, 금강산도, 관동팔경도 등의 주제들은 선비적 풍모와 문인적 자질을 갖추고 싶어 했던 조선 후기 남성들의 취향이 반영되어 상당한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체풍으로 그려진 것이 많아 특히 중상류층의 선호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조도, 어해도 등은 집안을 장식하는 풍조의 확산으로 여염집 수요에 따라 그려졌으며, 집의 규모와 용도에 따라 큰 병풍부터 안방용 병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모란도, 백동자도, 곽분양행락도, 백수백복도 등은 원래 궁중의 가례나 의례 때 사용하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민간에서도 혼례나 회갑연 등 의례용 수요에 따라 제작되었다.
민화의 화가와 화풍은 주문자 및 수요자와 그려진 목적에 따라 다양하다. 중상류층의 주문에 의한 그림은 화원을 비롯해 솜씨 좋은 전문 화가에 의해 좋은 재료를 써서 그려져 원체풍에 규모도 큰 것이 많다. 민간이나 여항의 수요는 사찰의 화승이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고,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그려졌으며, 특정한 형식과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그림의 주제를 잘 드러낼 수 있거나 민간에서 유행하는 화풍으로 그려져 개성이 강한 그림들이 많다. 20세기 전반에는 민간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듯 집안 수요 그림을 직접 그리는 예도 많아졌고, 전국을 떠돌며 숙식을 제공받으며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던 떠돌이 화가들도 많았다. 이 시기 민간 화가들은 개항 이후 외부로 부터의 문화적 경험이 더해져 계보를 따르는 형식적인 표현방식을 벗어나 목적과 수요에 부합하도록 변형된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근대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조형을 보여 주었다. 20세기 초에는 민간의 그림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판화나 인쇄화도 등장하게 된다.

특징 및 의의

민화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항과 더불어 외부의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고, 사회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던 시기의 그림이다. 조선 후기 상업경제의 발달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신흥부유층이 문화계의 중심에 부상하고 여기에 신분제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류층만이 향유하던 사회, 문화적 현상이 하층으로 확산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림 역시 동일한 문화의 흐름에 있었으며, 민화는 제작자, 수요자, 향유환경 등 모든 측면에서 당시의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보여 주고있다. 화원이나 전문화가들 중심의 회화 제작은 점차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정의 화가들에게 넘어갔다. 일부 상류층의 가옥을 장식했던 크고 작은 장식 병풍은 부를 축적한 여염집에도 놓이게 되고 점차 서민들의 생활공간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정치하게 그려진 그림은 아닐지라도 주제에 담겨진 이야기는 그림과 함께 구전되었고, 그려진 형태보다는 주제가 중심이 되어 그림이 확산되었다. 민화는 근대전환기의 공간에서 전통미술의 존재양상을 담고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민화이야기(윤열수, 디자인하우스, 1995), 이조의 민화(이우환, 열화당, 1979),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허균, 교보문고, 1991), 조선시대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한국민화론고(김철순, 예경, 1991), 한국의 민화(김호연, 열화당, 1978).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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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윤정(金潤貞)
갱신일 2017-12-20

정의

조선시대 민간에서 생활이나 의례 공간을 장식하였고, 조선 후기 이후 경제성장으로 시장성을 확보한 후 20세기 초에는 시장을 통해 유통된 그림.

개관

‘민화民畵’라는 용어는 일본의 민예운동가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처음 사용하였다. 야나기는1929년 3월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오오츠에[大津繪]와 같은 민예적 그림을 지칭하기 위해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1937년 『공예工藝』 제73호 「공예적 회화工藝的 繪畵」 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이 글에서 ‘민중에 의해 태어나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사용된 그림’을 ‘민화’로 정의하였고 그 예로 일본의 오오츠 지방의 기념품 그림인 오오츠에와에마[繪馬] 등을 예로 들었다. 야나기의 조선민화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일본 민화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1959년 『민예民藝』 제80호의 「불가사의한 조선민화」 와 같은 책에 실린 「조선의 민화」 두 편의 글에서 구체적인 그림과 함께 조선민화를 소개하였다. 그는 어느 나라에나 “회화에는 이를테면 정통파 회화와 비정통파 회화 두 가지의 흐름이 있는데, 전자는 예술가로서 화가의 작품이며, 후자는 화공이 그리는 구매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고 서명의 유무, 감상과 실용성이라는 목적의 차이, 유일하게 한 장으로 그려지는 그림과 반복적으로 생산해 내는 그림, 창조를 본성으로 하는 그림과 민족의 전통과 연관 있는 그림 등 이른바 제도권 그림과 그렇지 못한 그림의 특징 비교를 통해 민화를 규정지었다.야나기의 민예론은 야나기가 민예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1930년대 말 조선에도 소개되었다. 1939년 10월 『동아일보』에는 ‘조선공예의 주변周邊’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당시 조선공예의 상황과 야나기의 민예관 및 일본민예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민예에 대한 소개가 즉각적으로 있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민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고 1970~1980년대에 이르러 주목받았다. 1970년대 이후 민화는 화원이나 문인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정통회화와 달리 중국화풍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우리 민족의 생활 정서와 사상을 가식 없이 드러낸 순수한 우리 그림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조자용도 『한국민화의 멋』(브리태니커, 1972)을 통해 ‘민’을 사회적 지위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평등한 지위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민화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국인으로 돌아간 경지에서 그려낸 멋의 그림이라 하였다. 김호연은 민화에 대한 미적 경험을 바탕으로 민화를 ‘겨레그림’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을 바탕으로 민화에 대한 인식은 주제에서부터 표현양식과 색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한국인의 생활미감과 정서를 담고 있는 그림으로서 ‘진정하고 유일한’ 우리의 그림이라는 시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이후 현재까지 민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뿐 아니라 민화를 좋아하는 감상자 층이나 현재 민화풍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의 의식이나 작화 태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이우환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민화의 용도에 더욱 천착하여 민화의 생활화적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하였으며, 작가로서의 인식을 곁들여 회화로서 민화를 보는 시각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우환의 시각은 이후 현대 미술작가들 가운데 색과 조형 등에 한국적인 것으로서 민화의 특징을 반영하려는 움직임에 영향을 주었다. 1980~199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한국적 사회상황과 맞물려 ‘민중’이 부각되면서 민화를 민중화로 연결시키는 담론으로 이어졌다. 이 견해는 중세 봉건사회 내부에서 이룩된 생산력 발전이 신분사회를 변화시켰고, 이러한 당시의 사회역사적 배경이 민중화로서 민화의 생산과 소비를 가능케 했다고 보았다. 민화를 봉건 사회의 해체기에 드러나는 서민의식 또는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진보적인 미술행위로 보고 민화의 조형세계를 원체풍과 같은 권위적인 제도권 미술을 해체하고자 한 저항적인 미의식의 발현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1990년대에 들어 민화의 선행적 형태인 궁중화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민화로 그려진 각 주제에 대한 연구와 중국 민간년화 등 동아시아 회화의 영향에 대한 연구에 힘입어 동아시아 전반의 회화사 맥락에서 민화를 자리매김하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민화로 그려지는 그림의 주제에 대한 사적인 고찰을 통해 조선 후기 민화의 연원을 연구하고 있으며, 한반도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에 이르는 동아시아적 문화와 미술의 흐름 속에서 민화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일면 그동안 우리 회화사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던 민화를 그림 그 자체로서 회화사의 선상에 자리 잡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한편 궁궐에서 사용했던 것을 비롯해 채색장식화 전반을 민화로 확대 해석하고 이를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거나 궁중화풍의 민화를 고급민화로 별도로 분류하면서 민화에 대한 개념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막연하게 나마 민화를 서민층의 회화라고 개념 짓던 학자들조차도 민화의 대표작으로 전문화가(또는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꼽고 심지어는 왕실이나 상류층에서 화가들을 시켜 그리고 장식했던 그림 들이 대표작으로 전시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에 궁궐에서 의례와 장식용으로 사용하던 그림을 ‘궁화’로 구분해서 부르고 그 이외의 민간 수요 그림을 ‘민화’로 부르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내용

민화는 조선 후기 기복호사풍조에 따른 그림에 대한 서민층의 수요 증가 이후 크게 확산되었다. 조선 후기 시장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한 중인층의 성장으로 한양을 비롯한 도시를 중심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경제의 성장으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 늘어나면서 생활공간에 대한 치장이 유행하게 되면서 민화가 퍼져 나갔다.19세기 후반 한양의 모습을 담은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에는 종로통 광통교 아래에서 백자도, 곽분양행락도, 십장생도, 구운몽도, 신선도 등이 병풍이나 낱장으로 제작, 유통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광통교 일대는 이미 18세기부터 서화 유통 공간이 형성되어 20세기 초까지도 그림 시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다양한 종류의 문과 벽을 장식할 그림이 판매되었다. 지전에서는 그림 그리는 이를 고용하여 그려 팔기도 하였고 도화서 화원을 비롯한 당대 유명 서화가들의 그림도 유통되었다. 이처럼 민간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던 그림들은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에서 온 이방인들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민속조사를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던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가 경상도 밀양 어느 시장에서 사가지고 간 문자도는 현재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처럼 조선에 왔던 이방인들은 개항지뿐 아니라 전국을 여행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눈에 띤 조선의 그림은 ‘도배할 때 집안을 치장했던, 집안의 방문과 벽장문에 붙어있던 그림’, ‘혼례나 제사와 같은 의례를 치를 때 의례 장소를 치장했던 그림’이었다. 20세기 초 서울 주재 이태리 총영사로 있었던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의 책에는 “종로에 복제화와 종이를 파는 거리에서 몇 전만 주면, 용이나 호랑이, 날개 돋친 말, 옛 전사들의 환상적인 형상들을 구할 수 있는데, 이것들을 문짝에 붙여 놓으면 집에서 악귀를 내쫓는다고 한다. 이들 복제화 중에는 옛 신화에 등장하는 성현들과 수호신을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방에만 사용하며 한국의 어느 집에나 같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고 하여 19세기 중반 한산거사의 글에 나오던 종로 광통교 시장의 그림 파는 곳과 같은 그림가게가 50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까지 이어지고 있음 알 수 있다.근대기의 미술사가 윤희순尹喜淳, 1906~1947도 조선민족은 원래 벽장壁欌·두껍닫이·덧문·벽壁 등에 산수화山水畵·채화彩畵 등을 장식하기 위해 도배할 때는 으레 지전紙廛에서 소위 서화書畵 몇 장씩을 구할 줄 안다고 하여 당시의 풍속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그림치장은 주로 도배 철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면서 이뤄졌고 여기에 쓰이는 그림은 지전 등을 통해 유통된 것이다. 경기 지역의 성주풀이인 에서 “도배를 한 연후에 그림치장 없을 소냐……”라고 한 것은 도배와 그림치장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1912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인쇄소인 보진재寶晋齋는 1920~1930년대 도배용 인쇄그림을 찍어내 전국에 판매하였다.조선 민화의 가치를 일찍이 발견했던 야나기를 비롯한 일본인들도 1930년대부터 조선 민화를 활발히 수집해 현재 많은 수의 조선 민화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외국인들의 민화에 대한 관심과 수집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60년대 이후에도 일본을 비롯한 서양 각국의 방문객들이 민화를 수집해 가 현재 세계 유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일상생활 공간을 장식하던 그림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화’라는 용어로 인식되고 미술품으로 수집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점차 민화에 대한 특별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민화 붐으로 연결되었다. 이 시기 사라져 가는 민속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애호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0년 5월 민예동인 최순우, 김상옥, 예용해, 이경성, 김수근이 주관한 ‘한국민예전’(1970. 5. 2~10, 신세계백화점)은 이러한 움직임이 구체화된 예이며 민예 잡지 발간도 도모하였다. 이 전시를 알리는 기사에서 민예품의 소개와 더불어 전시에 출품된 회화들을 ‘민화’라는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우리 민속과 민속품에 대한 관심이 고취되었으며 민속품 수집과 유적지 답사를 목적으로 1971년 12월 발족한 민학회도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1972년 6월에는 민학회원들의 동인지 『민학民學』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이처럼 민속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골동시장에서 ‘민화’의 인기도 높아져 1970년대에는 이미 옛 그림을 모방한 그림이나 조선 민화의 전통을 계승한 새로운 그림들이 유통될 정도였다. 인사동, 청계천, 장안동 등 서울의 골동시장은 물론이고 지방까지도 민화가 활발히 유통되었고 서양이나 일본 애호가들도 민화를 많이 수집해 갔다. 특히 야나기의 영향을 받은 일본민예운동가들의 수집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현재일본에 있는 적지 않은 양의 조선 민화들이 이 시기에 수집되어 간 것들이다.민화는 궁정을 비롯한 상류층 수요의 그림을 모방한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주제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화목들이 유사하게 그려졌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길상벽사吉祥僻邪의 의미나 산수화, 인물화 등 역사적·문화적 은유나 상징을 담은 이야기들이 그려지는데, 민화 역시 길상 벽사적 주제부터 고사나 신화는 물론이고 산수화, 소경인물화, 사군자 같은 감상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그려지지 않은 주제가 없을 정도로 모든 화목을 포함하고 있다.집안의 치장이나 장엄 용도의 주제들은 주로 짙은 채색화로 그려졌으며, 감상 용도의 주제들은 담채나 수묵으로도 그려졌다. 이들 가운데 사회적 요구와 취향의 유행 등의 영향으로 주로 많이 그려졌던 주제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대표적인 민화 화목들로 보인다. 문방도, 문자도, 고사인물도, 산수도, 무이구곡도, 소상팔경도, 금강산도, 관동팔경도 등의 주제들은 선비적 풍모와 문인적 자질을 갖추고 싶어 했던 조선 후기 남성들의 취향이 반영되어 상당한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체풍으로 그려진 것이 많아 특히 중상류층의 선호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조도, 어해도 등은 집안을 장식하는 풍조의 확산으로 여염집 수요에 따라 그려졌으며, 집의 규모와 용도에 따라 큰 병풍부터 안방용 병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모란도, 백동자도, 곽분양행락도, 백수백복도 등은 원래 궁중의 가례나 의례 때 사용하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민간에서도 혼례나 회갑연 등 의례용 수요에 따라 제작되었다.민화의 화가와 화풍은 주문자 및 수요자와 그려진 목적에 따라 다양하다. 중상류층의 주문에 의한 그림은 화원을 비롯해 솜씨 좋은 전문 화가에 의해 좋은 재료를 써서 그려져 원체풍에 규모도 큰 것이 많다. 민간이나 여항의 수요는 사찰의 화승이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고,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그려졌으며, 특정한 형식과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그림의 주제를 잘 드러낼 수 있거나 민간에서 유행하는 화풍으로 그려져 개성이 강한 그림들이 많다. 20세기 전반에는 민간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듯 집안 수요 그림을 직접 그리는 예도 많아졌고, 전국을 떠돌며 숙식을 제공받으며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던 떠돌이 화가들도 많았다. 이 시기 민간 화가들은 개항 이후 외부로 부터의 문화적 경험이 더해져 계보를 따르는 형식적인 표현방식을 벗어나 목적과 수요에 부합하도록 변형된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근대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조형을 보여 주었다. 20세기 초에는 민간의 그림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판화나 인쇄화도 등장하게 된다.

특징 및 의의

민화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항과 더불어 외부의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고, 사회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던 시기의 그림이다. 조선 후기 상업경제의 발달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신흥부유층이 문화계의 중심에 부상하고 여기에 신분제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류층만이 향유하던 사회, 문화적 현상이 하층으로 확산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림 역시 동일한 문화의 흐름에 있었으며, 민화는 제작자, 수요자, 향유환경 등 모든 측면에서 당시의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보여 주고있다. 화원이나 전문화가들 중심의 회화 제작은 점차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정의 화가들에게 넘어갔다. 일부 상류층의 가옥을 장식했던 크고 작은 장식 병풍은 부를 축적한 여염집에도 놓이게 되고 점차 서민들의 생활공간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정치하게 그려진 그림은 아닐지라도 주제에 담겨진 이야기는 그림과 함께 구전되었고, 그려진 형태보다는 주제가 중심이 되어 그림이 확산되었다. 민화는 근대전환기의 공간에서 전통미술의 존재양상을 담고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민화이야기(윤열수, 디자인하우스, 1995), 이조의 민화(이우환, 열화당, 1979),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허균, 교보문고, 1991), 조선시대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한국민화론고(김철순, 예경, 1991), 한국의 민화(김호연, 열화당,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