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병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박정혜(朴廷蕙)
갱신일 2016-10-13

정의

모란꽃을 주제로 한 병풍 그림.

역사

동아시아에서 모란은 ‘꽃 중의 왕[花王]’으로 일컬어지며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송나라 주돈이周敦頤(1017~1073)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모란은 부귀”라고 정의한 이후 그 길상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7세기 전반에 이미 중국의 모란도가 유입되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모란도가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모란도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훼화花卉畫의 하나로 애호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병풍 그림으로 널리 그려졌다.

내용

조선시대에 모란병은 궁궐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화축畫軸이나 화첩畫帖에 그려진 모란도가 감상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병풍에 그려진 모란도는 장식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모란병은 주로 의례공간을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으며, 그 격식에 어울리는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한국적인 도상의 창안을 특징으로 들 수 있겠다. 조선시대 도감의궤都監儀軌에 의하면 모란병은 왕실의 국상國喪에서부터 관례冠禮, 가례嘉禮, 어진御眞 모사와 봉안, 궁궐 전각의 영건營建 등에 이르기까지 궁궐에서 그 쓰임의 폭이 가장 넓었던 병풍 그림이다. 특히 왕실 가례에서 모란병은 개복청改服廳이나 동뢰연청同牢宴廳에 주로 설치되었다. 민간에서도 모란병은 혼례나 회갑연, 회혼연 등 각종 연향에 꼭 필요한 병풍이었다. 민간의 혼례에서는 대례청大禮廳에 설치되는 주된 장식 그림이었으므로 대례병大禮屛으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 「서화書畫」의 기록에서 사족士族들은 혼례 때 제용감濟用監의 모란 대병大屛을 빌려 쓰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란병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하나는 탐스러운 꽃이 만발한 모란이 화면에 첩 구분 없이 연속해서 그려지는 형식이며, 다른 하나는 모란이 첩마다 독립적으로 배치되는 형식이다. 후자의 모란병은 세로로 긴 화면에 둔덕이나 괴석怪石을 중심으로 모란이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는 형상인데, 이는 실제 모란의 생태와는 다른 모습으로서 매우 형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민간에서는 주로 후자가 사용되었으며 현전하는 대부분의 모란병도 이에 속한다.

특징 및 의의

첩마다 비슷하거나 동일한 도상이 반복되는 모란병의 형식성은 조선시대 모란병만이 지니는 회화적 특징이기도 하다. 모란병은 병풍을 펼쳐놓았을 때 화려하면서도 준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므로, 모란이 함의하는 부귀의 길상성과 함께 다른 어느 주제의 병풍보다 혼례 같은 경사스러운 의례 공간에서 적합한 병풍으로 애호되었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이상희, 넥서스북스, 1998).

모란병

모란병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박정혜(朴廷蕙)
갱신일 2016-10-13

정의

모란꽃을 주제로 한 병풍 그림.

역사

동아시아에서 모란은 ‘꽃 중의 왕[花王]’으로 일컬어지며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송나라 주돈이周敦頤(1017~1073)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모란은 부귀”라고 정의한 이후 그 길상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7세기 전반에 이미 중국의 모란도가 유입되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모란도가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모란도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훼화花卉畫의 하나로 애호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병풍 그림으로 널리 그려졌다.

내용

조선시대에 모란병은 궁궐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화축畫軸이나 화첩畫帖에 그려진 모란도가 감상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병풍에 그려진 모란도는 장식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모란병은 주로 의례공간을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으며, 그 격식에 어울리는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한국적인 도상의 창안을 특징으로 들 수 있겠다. 조선시대 도감의궤都監儀軌에 의하면 모란병은 왕실의 국상國喪에서부터 관례冠禮, 가례嘉禮, 어진御眞 모사와 봉안, 궁궐 전각의 영건營建 등에 이르기까지 궁궐에서 그 쓰임의 폭이 가장 넓었던 병풍 그림이다. 특히 왕실 가례에서 모란병은 개복청改服廳이나 동뢰연청同牢宴廳에 주로 설치되었다. 민간에서도 모란병은 혼례나 회갑연, 회혼연 등 각종 연향에 꼭 필요한 병풍이었다. 민간의 혼례에서는 대례청大禮廳에 설치되는 주된 장식 그림이었으므로 대례병大禮屛으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 「서화書畫」의 기록에서 사족士族들은 혼례 때 제용감濟用監의 모란 대병大屛을 빌려 쓰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란병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하나는 탐스러운 꽃이 만발한 모란이 화면에 첩 구분 없이 연속해서 그려지는 형식이며, 다른 하나는 모란이 첩마다 독립적으로 배치되는 형식이다. 후자의 모란병은 세로로 긴 화면에 둔덕이나 괴석怪石을 중심으로 모란이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는 형상인데, 이는 실제 모란의 생태와는 다른 모습으로서 매우 형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민간에서는 주로 후자가 사용되었으며 현전하는 대부분의 모란병도 이에 속한다.

특징 및 의의

첩마다 비슷하거나 동일한 도상이 반복되는 모란병의 형식성은 조선시대 모란병만이 지니는 회화적 특징이기도 하다. 모란병은 병풍을 펼쳐놓았을 때 화려하면서도 준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므로, 모란이 함의하는 부귀의 길상성과 함께 다른 어느 주제의 병풍보다 혼례 같은 경사스러운 의례 공간에서 적합한 병풍으로 애호되었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이상희, 넥서스북스,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