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재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정형호(鄭亨鎬)
갱신일 2016-10-26

정의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 위에 서기, 물구나무 서기, 옆으로 매달리기, 좌우 넘나들기 등의 다양한 기예를 부리는 곡예.

내용

말 위에서 부리는 각종 곡예를 마상재馬上才라고 하며, 격구擊毬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에서 마상 무예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마상재가 행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말이 청동기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점에서 마상재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는 대륙의 영향을 받아 뛰어난 기마술과 마상 무예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마상재가 이미 있었을 것이다.

마상재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태조 이성계 관련 기록에 나온다. 이성계는 기사騎射뿐만 아니라 마상재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고려 말인 1362년 기록에 의하면, 이성계는 원나라 군대와 싸울 때 적장이 찌르는 창을 몸 숨기기 동작으로 피했다고 한다. 이 동작은 오른쪽 오금을 안장에 걸치고 오른손으로 안장 뒤쪽을 잡고 몸을 말 왼쪽으로 떨어뜨린 상태에서 말 왼쪽 옆구리에 거꾸로 매달려 달리는 것이다. 이런 몸 숨기기 동작으로 이성계가 몸을 피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에 마상재가 이미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때에는 서울의 살곶이[箭串]에서 임금이 배석한 가운데 말의 재주를 겨루는 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인조 때에는 일본 정부의 간청에 의하여 마상 무예에 뛰어난 장효인張孝仁과 김정金貞이 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마상재의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그 뒤로는 사절단에 반드시 마상재에 뛰어난 인물이 동행하게 되었다. 18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조선의 마상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이것을 모방하여 다이헤이혼류大坪本流라는 승마 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효종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면서 마상재를 시험하였다. 북벌 계획을 세웠던 효종이 일반 무예 및 마상 무예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시에도 마상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왕이 병사들의 마상재를 사열할 때 동석하여 관람한 후에 이를 한시로 썼다. 따라서 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초에 마상재가 성행해서, 왕이 직접 참관했음을 알 수 있다.

마상재는 정조 때에 발간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잘 나타나 있다. 주로 말 한 필을 이용해서 다양한 재주를 부리는 기예가 제시되어 있다. 이 책에는 말 위에 서 있는 주마립마상走馬立馬上, 말 등을 넘나드는 좌우초마左右招馬, 말 위에 거꾸로 서는 마상도립馬上倒立, 말 위에 가로 눕는 횡와마상양사橫臥馬上佯死, 말 옆구리에 몸을 숨기는 좌우등리장신左右鐙裏藏身, 말 위에서 뒤로 눕는 종와침마미縱臥枕馬尾, 두 마리 말 위에 서 있는 쌍주마립마상雙走馬立馬上와 같은 마상재의 일곱 가지 도상과 동작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고난도라고 볼 수 있는 쌍마를 이용한 마상재도 이루어졌다.

마상재에 사용하는 말은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택하되, 암말보다는 수말을 사용하였다. 특히 부루말(흰 말)을 최상으로 여겼으며, 가라말(검은 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말도 좋은 말로 간주하였다.

마상재를 실시할 때는 기본적으로 전립戰笠에 호의號衣를 입는다. 머리에는 전립을 착용하나, 투구를 착용하기도 한다. 전립은 무관들이 쓰던 군모의 일종으로 벙거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옷은 홍황색의 호의와 바지를 입는다.

마상재는 유목 민족인 몽골 족에게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몽골족은 말에서 태어나고 말에서 죽는 마배상馬背上 민족으로, 생활과 생존에 의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마상재를 익히게 되었다. 주로 여름의 나담(Na dam) 축제를 통해 마상 기예를 전승하는데, 이것은 주로 씨름[摔跤], 활쏘기[射箭], 말 경주[賽馬]를 중심으로 행해진다. 최근에는 말경주로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몽골은 최근까지 한 필의 말을 이용한 기예뿐만 아니라, 두 필의 말을 이용한 쌍인쌍마雙人雙馬, 여러 필의 말을 이용한 다인쌍마多人多馬 등의 고난도의 마상재를 전승하고 있다.

중국 마상재의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상세한 기록은 송나라 문헌에 나타난다. 북송의 수도인 변경汴京 지방의 풍습이나 생활, 예술 등을 기록한 책인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열세 가지 마상재 동작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의 마상재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한편 일본에도 마상재가 전승되는데, 도쿠가와德川 막부시대에 그린 그림이 전하고 있다. 막부시대에 그들의 요청에 의해 기마술이 능한 조선의 마상재인馬上才人 두 명이 조선통신사와 함께 수행하여 에도성江戶城, 東京 내에서 장군과 막부의 고관, 유명 번주藩主들 앞에서 각종 마상 기예를 펼쳤다. 당시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마상재도馬上才圖를 보면, 마상재 동작 중에서 ‘말 위에 서기’, ‘말 좌우로 넘어가기’, ‘말 위에 거꾸로 서기’의 세 가지 동작을 실연하고 있다.

우리의 마상재는 말의 효용성이 줄어든 조선 중·후기에도 전승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체계적인 전승이 중단되었으며, 1990년대에 와서 한민족마상 무예격구단에 의해 복원되었다.

특징 및 의의

마상재는 마상 무예의 성격이 있지만, 놀이적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말 위에서 다양한 재주를 부리는 기예로 기마 민족에게는 기마술을 익히고, 전시에 기마전에 대비한 무예의 하나로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전문적 무인들에 의한 뛰어난 무예술의 과시와 함께 여러 기예가 포함된 놀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마상재는 총포의 발달에 의한 기마술의 소멸과 함께 점차 약화되어 조선 후기에 전승이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武藝圖譜通志, 朝鮮王朝實錄, 마상재(김광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마상재(이원길, 다산 정약용 시선집, 해누리, 1994), 선시대통신사(국립중앙박물관, 삼화출판사, 1986), 한국마문화발달사(이시영, 한국마사회, 1991), 한국의 마상 무예(임동권·정형호,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7), 東京夢華錄(孟元老, 中國商業出版社, 1982).

마상재

마상재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정형호(鄭亨鎬)
갱신일 2016-10-26

정의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 위에 서기, 물구나무 서기, 옆으로 매달리기, 좌우 넘나들기 등의 다양한 기예를 부리는 곡예.

내용

말 위에서 부리는 각종 곡예를 마상재馬上才라고 하며, 격구擊毬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에서 마상 무예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마상재가 행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말이 청동기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점에서 마상재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는 대륙의 영향을 받아 뛰어난 기마술과 마상 무예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마상재가 이미 있었을 것이다. 마상재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태조 이성계 관련 기록에 나온다. 이성계는 기사騎射뿐만 아니라 마상재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고려 말인 1362년 기록에 의하면, 이성계는 원나라 군대와 싸울 때 적장이 찌르는 창을 몸 숨기기 동작으로 피했다고 한다. 이 동작은 오른쪽 오금을 안장에 걸치고 오른손으로 안장 뒤쪽을 잡고 몸을 말 왼쪽으로 떨어뜨린 상태에서 말 왼쪽 옆구리에 거꾸로 매달려 달리는 것이다. 이런 몸 숨기기 동작으로 이성계가 몸을 피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에 마상재가 이미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때에는 서울의 살곶이[箭串]에서 임금이 배석한 가운데 말의 재주를 겨루는 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인조 때에는 일본 정부의 간청에 의하여 마상 무예에 뛰어난 장효인張孝仁과 김정金貞이 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마상재의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그 뒤로는 사절단에 반드시 마상재에 뛰어난 인물이 동행하게 되었다. 18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조선의 마상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이것을 모방하여 다이헤이혼류大坪本流라는 승마 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효종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면서 마상재를 시험하였다. 북벌 계획을 세웠던 효종이 일반 무예 및 마상 무예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시에도 마상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왕이 병사들의 마상재를 사열할 때 동석하여 관람한 후에 이를 한시로 썼다. 따라서 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초에 마상재가 성행해서, 왕이 직접 참관했음을 알 수 있다. 마상재는 정조 때에 발간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잘 나타나 있다. 주로 말 한 필을 이용해서 다양한 재주를 부리는 기예가 제시되어 있다. 이 책에는 말 위에 서 있는 주마립마상走馬立馬上, 말 등을 넘나드는 좌우초마左右招馬, 말 위에 거꾸로 서는 마상도립馬上倒立, 말 위에 가로 눕는 횡와마상양사橫臥馬上佯死, 말 옆구리에 몸을 숨기는 좌우등리장신左右鐙裏藏身, 말 위에서 뒤로 눕는 종와침마미縱臥枕馬尾, 두 마리 말 위에 서 있는 쌍주마립마상雙走馬立馬上와 같은 마상재의 일곱 가지 도상과 동작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고난도라고 볼 수 있는 쌍마를 이용한 마상재도 이루어졌다. 마상재에 사용하는 말은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택하되, 암말보다는 수말을 사용하였다. 특히 부루말(흰 말)을 최상으로 여겼으며, 가라말(검은 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말도 좋은 말로 간주하였다. 마상재를 실시할 때는 기본적으로 전립戰笠에 호의號衣를 입는다. 머리에는 전립을 착용하나, 투구를 착용하기도 한다. 전립은 무관들이 쓰던 군모의 일종으로 벙거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옷은 홍황색의 호의와 바지를 입는다. 마상재는 유목 민족인 몽골 족에게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몽골족은 말에서 태어나고 말에서 죽는 마배상馬背上 민족으로, 생활과 생존에 의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마상재를 익히게 되었다. 주로 여름의 나담(Na dam) 축제를 통해 마상 기예를 전승하는데, 이것은 주로 씨름[摔跤], 활쏘기[射箭], 말 경주[賽馬]를 중심으로 행해진다. 최근에는 말경주로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몽골은 최근까지 한 필의 말을 이용한 기예뿐만 아니라, 두 필의 말을 이용한 쌍인쌍마雙人雙馬, 여러 필의 말을 이용한 다인쌍마多人多馬 등의 고난도의 마상재를 전승하고 있다. 중국 마상재의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상세한 기록은 송나라 문헌에 나타난다. 북송의 수도인 변경汴京 지방의 풍습이나 생활, 예술 등을 기록한 책인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열세 가지 마상재 동작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의 마상재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한편 일본에도 마상재가 전승되는데, 도쿠가와德川 막부시대에 그린 그림이 전하고 있다. 막부시대에 그들의 요청에 의해 기마술이 능한 조선의 마상재인馬上才人 두 명이 조선통신사와 함께 수행하여 에도성江戶城, 東京 내에서 장군과 막부의 고관, 유명 번주藩主들 앞에서 각종 마상 기예를 펼쳤다. 당시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마상재도馬上才圖를 보면, 마상재 동작 중에서 ‘말 위에 서기’, ‘말 좌우로 넘어가기’, ‘말 위에 거꾸로 서기’의 세 가지 동작을 실연하고 있다. 우리의 마상재는 말의 효용성이 줄어든 조선 중·후기에도 전승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체계적인 전승이 중단되었으며, 1990년대에 와서 한민족마상 무예격구단에 의해 복원되었다.

특징 및 의의

마상재는 마상 무예의 성격이 있지만, 놀이적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말 위에서 다양한 재주를 부리는 기예로 기마 민족에게는 기마술을 익히고, 전시에 기마전에 대비한 무예의 하나로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전문적 무인들에 의한 뛰어난 무예술의 과시와 함께 여러 기예가 포함된 놀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마상재는 총포의 발달에 의한 기마술의 소멸과 함께 점차 약화되어 조선 후기에 전승이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武藝圖譜通志, 朝鮮王朝實錄, 마상재(김광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마상재(이원길, 다산 정약용 시선집, 해누리, 1994), 선시대통신사(국립중앙박물관, 삼화출판사, 1986), 한국마문화발달사(이시영, 한국마사회, 1991), 한국의 마상 무예(임동권·정형호,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7), 東京夢華錄(孟元老, 中國商業出版社,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