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례상

한자명

大禮床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김상보(金尙寶)
갱신일 2016-10-13

정의

혼인 예식을 치르기 위해 차리는 상.

역사

17세기까지 가장 보편적이었던 혼인 형태는 ‘처가살이혼[婿入婚]’이었다.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과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기 전부터 이미 묵고 있었던 신랑과 신부를 위해 신방을 준비하고, 신방을 준비한 3일째에 비로소 동뢰연同牢宴을 받았는데 이때 신랑 집은 신부 집에서 치르는 잔치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부 집으로 돼지와 술을 보냈다[禮幣]. 고려시대에는 이 동뢰연을 ‘독좌獨坐’라 하였다. 돼지와 술로 구성된 신랑 집에서 보낸 예폐는 독좌 이후 신부 집에서 치르는 잔치를 통해 공음공식共飮共食하는 데 쓰는 신성한 주식酒食이 되었다.

고려 말기 봉건적 신분제도와 가부장제적 질서유지를 강화하고자 정몽주鄭夢周(1337~1392) 등은 주도적으로 일련의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이 개혁은 ‘처가살이혼’ 대신 유학을 근거로 ‘시집살이혼[嫁入婚]’을 치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349년(고려 충정왕원년) 공민왕恭愍王은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혼인할 때 북경에서 친영親迎하여 ‘시집살이혼’을 실천하였다.

고려 말기에 행한 개혁 조치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다음 정권에서 속행되었다. 조선왕조는 개국과 더불어 정권을 더욱 정치・사상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도학적 윤리관을 확립하고 의례를 정비하면서 ‘시집살이혼’인 ‘친영혼’을 채택하였다. 1419년(세종원년) 세종은 왕가의 자녀 혼인에 친영례親迎禮를 따른다고 교시하여 왕가부터 솔선수범하고자 하였지만, 궁중에서 친영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512년(중종 7) 10월에 중종은 “조선의 풍속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는 것을 정식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고례古禮(친영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지금부터 왕자와 왕녀의 혼인은 모두 고제古制에 따라 행한다.”라고 교시를 내리고 1525년(중종 20)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타난 「사자에게 명하여 왕비를 봉영奉迎하는 의식」 대신에 왕이 직접 신부를 맞이하는 올바른 친영례를 고례에 준하여 고찰하도록 하여, 친영 장소로 정한 태평관太平館에 왕이 몸소 가서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사문화된 「왕비를 맞아들일 때 친영하는 의식」은 1702년(숙종 28)에 비로소 제정되었고, 그 후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첨부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왕가의 혼례는 중종 이후 간택揀擇・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친영・동뢰연・조현례朝見禮, 見舅姑禮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518년(중종 13) 사림에서는 김치운金致雲이 최초로 친영례를 행했다. 그로부터 6년 후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처단된 이후 친영례는 폐지되었다. 명종대(1545~1567년)에 들어서자 사서인士庶人 사이에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동뢰연을 행한 다음, 다음 날 아침 신랑 집으로 와 시부모에게 조현례를 행하는 반친영례半親迎禮가 행해졌다. 반친영례는 16세기 후반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반친영례 역시 친영례와 마찬가지의 의례 절차를 밟았음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와 사림에서 전개된 친영례와 반친영례는 친영 이후 동뢰연을 반드시 치러야 혼인이 성립되었다. 대례상大禮床이란 바로 동례연에서 차리는 동뢰연상을 말한다. 그러나 유교적 예제에 기반을 둔 동뢰연상이라 하더라도 조선왕조의 동뢰연상은 고려왕조의 것을 속례俗禮로서 받아들여 전개되었고, 사림에서 행한 반친영에서의 동뢰연상은 조선왕조의 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내용

『의례儀禮』 「사혼례士昏禮」에서 제시한 동뢰연상은 삶아 익힌 특돈特豚(새끼 돼지) 1마리를 중심으로 왼편 1/2은 신랑을 위해, 오른편 1/2은 신부를 위해 차리는 것이었다. 동同은 ‘한가지 동’, 뢰牢는 ‘짐승 뢰’이므로 동뢰연이란 “돼지로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게 하는 예”라는 뜻이다. 사士의 혼례이지만 성대하고 기쁜행사이기 때문에 대부大夫의 예에 따라 신랑과 신부 앞에 각각 6두豆(급湇・장醬・저菹・해醢・서黍・직稷)와 3조俎(돈豚 1/2마리, 석腊, 어魚)를 함께 차린 동뢰연상은 음陰과 양陽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었다. 6두는 음이고 3조는 양이다. 이는 천시天時의 추이에 의하여 생성된 양성陽性(고기) 음식은 홀수로 담고, 음성陰性(곡류와 채소류) 음식은 짝수로 담아 음과 양을 합하게 하여 이 음식으로 신神을 접대하고 음복飮福을 통하여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는 성의를 다한 상차림이다.

이러한 「사혼례」의 동뢰연 상차림은 반친영혼에서 좀처럼 적용되지 못하였다. 1626년(인조 4) 반친영혼때 신부 집에서 행한 동뢰연상 음식이 『성재집省齋集』에 기술되어 있다. 채菜(나물) 3기와 과果(유밀과와 과일) 6기를 함께 신랑과 신부 앞에 각각 차렸다. 과일과 나물이 중심인 이 상차림은 이재李縡(1680~1746)가 쓴 『사례편람四禮便覽』과 1900년(광무 4)에 간행된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으로 이어졌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사혼례」의 동뢰연 상차림에 당시의 풍속을 참작하여 동뢰연 상차림을 규범으로 제시하였다 .6두(갱湇, 장, 김치菹, 젓갈醢, 떡黍, 밥稷)와 3조(돼지特豚1/2마리, 닭腊 1/2마리, 생선魚)를 모두 함께 신랑과 신부 앞에 차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다음에는 1749년(영조 25)에 제정한 『어제국혼정례御製國婚定例』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에서 왕세자 가례때에 행한 동뢰연상을 알 수 있다. 민중의 혼례이든 왕가의 혼례이든 동뢰연의 주목적은 신랑과 신부가 음식으로 한 몸이 되고 술로 영혼을 일체화하는 것이었다. 이때 술 석 잔을 술안주와 함께 올린다. 제1잔은 좨주祭酒이고, 제2잔은 먹은 음식을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술이며, 제3잔은 둘로 쪼개어서 만든 표주박 잔으로 마시는 합근주合巹酒이다. 이 술 석 잔의 안주로 동원된 것이 「사혼례」에서는 특돈이었지만, 반친영혼을 적용했던 민중들은 과果와 채菜였고, 친영혼을 적용했던 조선왕조는 삼미三味였다. 삼미란 초미初味, 이미二味, 삼미三味를 말한다. 술 제1잔의 술안주가 초미이고, 술 제2잔의 술안주가 이미이며, 술 제3잔의 술안주가 삼미이다 . 삼미의 적용은 고려왕실의 혼례를 속례로서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런데 삼미만으로는 대례를 치르는 데에 부족하다고 여긴 탓인지, 미수사방반味數四方盤 1상과 중원반中圓盤 1상, 과반果盤 3상을 삼미에 곁들여 신랑과 신부 앞에 각각 차렸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대례상이란 삼미, 미수사방반, 중원반, 과반의 세 상을 신랑과 신부 앞에 함께 차린 것을 말하며, 이들은 술 석 잔에 따른 안주상차림이다.

규범과 관행이 다르게 전개된 민중의 대례상(동뢰연상)의 경우, 1800년대 말에는 혼인날 신부 집 문 앞에 송죽松竹을 세웠다. 그 이유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세간에서 경사스러움의 대표로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소나무 잎은 항상 푸르고 대나무는 사계절 내내 고사하지 않아 건강과 장수長壽, 지조와 굳은 절개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室 또는 대청이나 마당에 교배석交拜席을 마련한 다음 밤・대추 등의 과일, 주전자와 술잔 그리고 합근合巹(표주박을 두 개로 쪼개어 만든 술잔으로 하나는 신랑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부 것임)을 진설한 고족상高足床(발 높은 상)을 한가운데 놓고 이것을 대례상이라 하였다.

대례상의 위 양 끝에는 몸을 묶은 닭 두 마리를 청색 보자기와 홍색 보자기에 싸서 놓는데, 이는 처가살이혼에 시집살이혼이 결합한 반친영혼 상차림으로 이러한 상차림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특징 및 의의

1969년에 출간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보면 전라남도 나주에서 행한 대례상 차림에서는 발 높은 고족상인 제례상을 대례상으로 쓰며, 상을 차리는 장소는 안마당이다. 동쪽(신랑 쪽)에는 살아있는 수탉, 서쪽(신부 쪽)에는 살아있는 암탉을 상에 올려놓고 밤 1기, 대추 1기, 정화수 1기, 청주를 담은 백자술병 2기, 합근을 차린다. 상 중앙의 양 끝에 곡식을 되는 말[斗]에 면화씨를 가득 담아놓고 여기에다 사철나무, 대나무, 동백나무를 꺾어 꽂고는 종이꽃[床花]을 아름답게 만들어 단지에 꽂아 장식하고 있다. 암탉・수탉을 놓는 것은 동고동락의 뜻이고, 사철나무・동백나무・대나무를 놓는 것은 지조가 숭고함을 찬양하는 뜻이며, 상화를 놓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찬미하는 뜻이라고 한다. 이상의 대례상 차림은 1800년대 말에 보이던 대례상 차림을 계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나무 대신에 사철나무・동백나무를 쓰는 점, 쌀 대신에 면화씨를 담은 두斗를 쓰는 점 등은 나주라는 지역의 특성에 의하여 약간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高麗圖經,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北史, 四禮便覽, 省齋集, 御製國婚定例, 與猶堂全書, 禮 記, 儀禮, 增補文獻備考, 增補四禮便覽, 春官志,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김상보, 수학사, 1995), 조선왕조 혼례연향음식문화(김상보, 신광출판사, 2003), 한국민속종합보고서-전남(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69).

대례상

대례상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김상보(金尙寶)
갱신일 2016-10-13

정의

혼인 예식을 치르기 위해 차리는 상.

역사

17세기까지 가장 보편적이었던 혼인 형태는 ‘처가살이혼[婿入婚]’이었다.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과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기 전부터 이미 묵고 있었던 신랑과 신부를 위해 신방을 준비하고, 신방을 준비한 3일째에 비로소 동뢰연同牢宴을 받았는데 이때 신랑 집은 신부 집에서 치르는 잔치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부 집으로 돼지와 술을 보냈다[禮幣]. 고려시대에는 이 동뢰연을 ‘독좌獨坐’라 하였다. 돼지와 술로 구성된 신랑 집에서 보낸 예폐는 독좌 이후 신부 집에서 치르는 잔치를 통해 공음공식共飮共食하는 데 쓰는 신성한 주식酒食이 되었다. 고려 말기 봉건적 신분제도와 가부장제적 질서유지를 강화하고자 정몽주鄭夢周(1337~1392) 등은 주도적으로 일련의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이 개혁은 ‘처가살이혼’ 대신 유학을 근거로 ‘시집살이혼[嫁入婚]’을 치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349년(고려 충정왕원년) 공민왕恭愍王은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혼인할 때 북경에서 친영親迎하여 ‘시집살이혼’을 실천하였다. 고려 말기에 행한 개혁 조치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다음 정권에서 속행되었다. 조선왕조는 개국과 더불어 정권을 더욱 정치・사상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도학적 윤리관을 확립하고 의례를 정비하면서 ‘시집살이혼’인 ‘친영혼’을 채택하였다. 1419년(세종원년) 세종은 왕가의 자녀 혼인에 친영례親迎禮를 따른다고 교시하여 왕가부터 솔선수범하고자 하였지만, 궁중에서 친영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512년(중종 7) 10월에 중종은 “조선의 풍속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는 것을 정식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고례古禮(친영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지금부터 왕자와 왕녀의 혼인은 모두 고제古制에 따라 행한다.”라고 교시를 내리고 1525년(중종 20)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타난 「사자에게 명하여 왕비를 봉영奉迎하는 의식」 대신에 왕이 직접 신부를 맞이하는 올바른 친영례를 고례에 준하여 고찰하도록 하여, 친영 장소로 정한 태평관太平館에 왕이 몸소 가서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사문화된 「왕비를 맞아들일 때 친영하는 의식」은 1702년(숙종 28)에 비로소 제정되었고, 그 후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첨부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왕가의 혼례는 중종 이후 간택揀擇・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친영・동뢰연・조현례朝見禮, 見舅姑禮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518년(중종 13) 사림에서는 김치운金致雲이 최초로 친영례를 행했다. 그로부터 6년 후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처단된 이후 친영례는 폐지되었다. 명종대(1545~1567년)에 들어서자 사서인士庶人 사이에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동뢰연을 행한 다음, 다음 날 아침 신랑 집으로 와 시부모에게 조현례를 행하는 반친영례半親迎禮가 행해졌다. 반친영례는 16세기 후반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반친영례 역시 친영례와 마찬가지의 의례 절차를 밟았음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와 사림에서 전개된 친영례와 반친영례는 친영 이후 동뢰연을 반드시 치러야 혼인이 성립되었다. 대례상大禮床이란 바로 동례연에서 차리는 동뢰연상을 말한다. 그러나 유교적 예제에 기반을 둔 동뢰연상이라 하더라도 조선왕조의 동뢰연상은 고려왕조의 것을 속례俗禮로서 받아들여 전개되었고, 사림에서 행한 반친영에서의 동뢰연상은 조선왕조의 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내용

『의례儀禮』 「사혼례士昏禮」에서 제시한 동뢰연상은 삶아 익힌 특돈特豚(새끼 돼지) 1마리를 중심으로 왼편 1/2은 신랑을 위해, 오른편 1/2은 신부를 위해 차리는 것이었다. 동同은 ‘한가지 동’, 뢰牢는 ‘짐승 뢰’이므로 동뢰연이란 “돼지로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게 하는 예”라는 뜻이다. 사士의 혼례이지만 성대하고 기쁜행사이기 때문에 대부大夫의 예에 따라 신랑과 신부 앞에 각각 6두豆(급湇・장醬・저菹・해醢・서黍・직稷)와 3조俎(돈豚 1/2마리, 석腊, 어魚)를 함께 차린 동뢰연상은 음陰과 양陽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었다. 6두는 음이고 3조는 양이다. 이는 천시天時의 추이에 의하여 생성된 양성陽性(고기) 음식은 홀수로 담고, 음성陰性(곡류와 채소류) 음식은 짝수로 담아 음과 양을 합하게 하여 이 음식으로 신神을 접대하고 음복飮福을 통하여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는 성의를 다한 상차림이다. 이러한 「사혼례」의 동뢰연 상차림은 반친영혼에서 좀처럼 적용되지 못하였다. 1626년(인조 4) 반친영혼때 신부 집에서 행한 동뢰연상 음식이 『성재집省齋集』에 기술되어 있다. 채菜(나물) 3기와 과果(유밀과와 과일) 6기를 함께 신랑과 신부 앞에 각각 차렸다. 과일과 나물이 중심인 이 상차림은 이재李縡(1680~1746)가 쓴 『사례편람四禮便覽』과 1900년(광무 4)에 간행된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으로 이어졌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사혼례」의 동뢰연 상차림에 당시의 풍속을 참작하여 동뢰연 상차림을 규범으로 제시하였다 .6두(갱湇, 장, 김치菹, 젓갈醢, 떡黍, 밥稷)와 3조(돼지特豚1/2마리, 닭腊 1/2마리, 생선魚)를 모두 함께 신랑과 신부 앞에 차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다음에는 1749년(영조 25)에 제정한 『어제국혼정례御製國婚定例』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에서 왕세자 가례때에 행한 동뢰연상을 알 수 있다. 민중의 혼례이든 왕가의 혼례이든 동뢰연의 주목적은 신랑과 신부가 음식으로 한 몸이 되고 술로 영혼을 일체화하는 것이었다. 이때 술 석 잔을 술안주와 함께 올린다. 제1잔은 좨주祭酒이고, 제2잔은 먹은 음식을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술이며, 제3잔은 둘로 쪼개어서 만든 표주박 잔으로 마시는 합근주合巹酒이다. 이 술 석 잔의 안주로 동원된 것이 「사혼례」에서는 특돈이었지만, 반친영혼을 적용했던 민중들은 과果와 채菜였고, 친영혼을 적용했던 조선왕조는 삼미三味였다. 삼미란 초미初味, 이미二味, 삼미三味를 말한다. 술 제1잔의 술안주가 초미이고, 술 제2잔의 술안주가 이미이며, 술 제3잔의 술안주가 삼미이다 . 삼미의 적용은 고려왕실의 혼례를 속례로서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런데 삼미만으로는 대례를 치르는 데에 부족하다고 여긴 탓인지, 미수사방반味數四方盤 1상과 중원반中圓盤 1상, 과반果盤 3상을 삼미에 곁들여 신랑과 신부 앞에 각각 차렸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대례상이란 삼미, 미수사방반, 중원반, 과반의 세 상을 신랑과 신부 앞에 함께 차린 것을 말하며, 이들은 술 석 잔에 따른 안주상차림이다. 규범과 관행이 다르게 전개된 민중의 대례상(동뢰연상)의 경우, 1800년대 말에는 혼인날 신부 집 문 앞에 송죽松竹을 세웠다. 그 이유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세간에서 경사스러움의 대표로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소나무 잎은 항상 푸르고 대나무는 사계절 내내 고사하지 않아 건강과 장수長壽, 지조와 굳은 절개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室 또는 대청이나 마당에 교배석交拜席을 마련한 다음 밤・대추 등의 과일, 주전자와 술잔 그리고 합근合巹(표주박을 두 개로 쪼개어 만든 술잔으로 하나는 신랑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부 것임)을 진설한 고족상高足床(발 높은 상)을 한가운데 놓고 이것을 대례상이라 하였다. 대례상의 위 양 끝에는 몸을 묶은 닭 두 마리를 청색 보자기와 홍색 보자기에 싸서 놓는데, 이는 처가살이혼에 시집살이혼이 결합한 반친영혼 상차림으로 이러한 상차림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특징 및 의의

1969년에 출간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보면 전라남도 나주에서 행한 대례상 차림에서는 발 높은 고족상인 제례상을 대례상으로 쓰며, 상을 차리는 장소는 안마당이다. 동쪽(신랑 쪽)에는 살아있는 수탉, 서쪽(신부 쪽)에는 살아있는 암탉을 상에 올려놓고 밤 1기, 대추 1기, 정화수 1기, 청주를 담은 백자술병 2기, 합근을 차린다. 상 중앙의 양 끝에 곡식을 되는 말[斗]에 면화씨를 가득 담아놓고 여기에다 사철나무, 대나무, 동백나무를 꺾어 꽂고는 종이꽃[床花]을 아름답게 만들어 단지에 꽂아 장식하고 있다. 암탉・수탉을 놓는 것은 동고동락의 뜻이고, 사철나무・동백나무・대나무를 놓는 것은 지조가 숭고함을 찬양하는 뜻이며, 상화를 놓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찬미하는 뜻이라고 한다. 이상의 대례상 차림은 1800년대 말에 보이던 대례상 차림을 계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나무 대신에 사철나무・동백나무를 쓰는 점, 쌀 대신에 면화씨를 담은 두斗를 쓰는 점 등은 나주라는 지역의 특성에 의하여 약간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高麗圖經,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北史, 四禮便覽, 省齋集, 御製國婚定例, 與猶堂全書, 禮 記, 儀禮, 增補文獻備考, 增補四禮便覽, 春官志,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김상보, 수학사, 1995), 조선왕조 혼례연향음식문화(김상보, 신광출판사, 2003), 한국민속종합보고서-전남(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