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한자명

端宗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신

집필자 김효경(金孝慶)
갱신일 2016-10-27

정의

조선의 제6대 임금.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하여 무속에서 섬기는 신(神)이기도 하다. 8세에 왕세손으로 봉해져서, 문종이 훙(薨)한 뒤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창덕궁에 거처한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군(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유배 중에 또 다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 당한다.

내용

정변(政變)에 희생된 비운의 왕이라는 평가만이 남아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졌으나 단종(1441~1457)은 역사의 이면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아 숨쉬는 신령으로 존재하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이자 또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영월 일대의 지역민들은 그를 마을신이나 무신(巫神)으로 모시고 있다.

단종이 신령으로 좌정하게 된 것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에 토대한다. 그는 왕의 신분으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파했던 당대의 사람들이나 후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억울하고 외로운 영혼은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활하였다. 생물학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다. 단종의 비극적인 삶은 양위(讓位)로부터 비롯되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아파하는 계기는 그의 유배생활에서 비롯되었다. 단종이 신격화되는 것은 그의 유배 길과 유배생활에서 잘 드러난다. 유배 자체가 신격화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영월에서의 유배생활은 단종과 지역민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기능하였고, 다른 지역보다 단종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영월 지역민들에게 있어서 단종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간직될 수 있었다.

한양으로부터 영월에 이르는 유배 길에는 도처에 단종과 관련한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비록 기록되지는 않은 역사이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출발지인 서울의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화양정(華陽亭)에는 그가 유배 길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이 깃든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필두로 영월에 이르기까지 곳곳에는 단종의 유배와 관련한 전설과 지명이 전한다.

영월에서의 유배생활 역시 백성들의 관심과 슬픔으로 이어진다. 첫 유배지인 청령포(淸泠浦)는 토사가 퇴적되어 생긴 섬으로, 배를 이용해서만이 왕래할 수 있는 매우 험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단종은 구들장도 없는 마루를 설치하고 그 위에 돗자리만 깐 투막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홍수로 피해를 보고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갔다. 이 홍수에 대해서는 단순한 집중 호우가 아니라 어떤 신의(神意)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단종이 유배되자 그의 외조모인 화산(花山)부인 최씨가 무당 용안 등을 거느리고 영월에 내려와 단종을 위한 굿을 하였는데 굿이 끝나는 날 큰비가 와서 청령포가 침수되었으며, 그 결과 단종은 영월부중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관풍헌에서는 비교적 편안하고 개방된 생활을 하였다. 단종에게 과실을 바치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실제로 추익한(秋益漢, 1383~1457)이 머루를 진상했다. 지역민들은 이미 폐위되었으나 군왕이었던 단종을 지척에서 배알(拜謁)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동정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본격적인 신격화 단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 그를 신격화하는 신앙적 토대로 기능했다.

단종이 신령으로 승화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단종 숙부인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조정에서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3개월 후인 10월 24일(1457)에 단종의 부음(訃音)이 전해진다. 단종이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사사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단종에게 사사를 내리는 과정에서 사신은 왕명 집행을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왕명 집행은 천리(天理)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곧 왕명과 천명 사이에서 사신들은 갈등하였지만 이러한 사신들의 희생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 위해 단종은 순순히 죽음을 택했다.

여기서 백성을 생각하는 성군(聖君) 단종의 모습과 폭군 세조가 대비되면서 그의 죽음은 한층 지역민들에게 아픔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강요된 죽음인 사사와 함께 그의 시신이 유기(遺棄)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차원에서 충격적이다. “숲속에 버려진 후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사람이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다”거나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 같은 가는 열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종의 비참한 삶과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단종이 완전히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신령으로 승화되어 단종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처럼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를 신격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양위, 유배, 강요된 죽음, 시신의 방치 등은 단종이 죽었으되 온전히 죽지 못하는 요인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종의 영혼이 원혼(冤魂)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단종은 신격화를 통하여 이승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섬김으로써 그로부터 가호를 빌 수 있었다. 단종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태백산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죽었던 단종이 죽음을 극복하고서 백마를 타고 태백산신이 되기 위하여 태백산으로 갔다는 전설 등이다.

단종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제사를 받을 수 없었다. 가혹한 핍박 속에서도 단종은 비밀리에 서서히 제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성종 3년(1472)에 죽은 단종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단종을 부처와 동일시하여 그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신비가 강조됨으로써 신격화하는 무리가 생긴 것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출생 자체가 단종을 비상한 인물 또는 부처와 견줄 만한 신적 존재로 믿게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백성의 집단적 표상 및 패배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여 자신들의 영웅을 만들어냈다.

또한 단종은 구체적이 직능을 지닌 신령으로 인식되었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매양 밝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손수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어 향을 피워 빌면 비가 쏟아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종이 기우(祈雨)에 효험을 나타내는 신령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본국가인 조선에서 단종이 비를 내리는 신령으로 인지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매우 비중 있는 신격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에 들어와 재이(災異)를 소멸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국가 차원에서 단종을 제사 지냈고, 민간에서도 단종을 본격적으로 신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지역사례

단종에 대한 신앙은 단종에 대한 공식적인 사묘 건립과 무관하지 않다. 중종 11년(1516)에 공식적인 제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월에는 상식을 벗어난 흉사(凶事)가 일어났다. 중종 36년(1541)에 영월에 부임한 군수가 7개월간 3명이나 사망하고, 전염병이 유난히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영월 지역민들은 이러한 흉사의 원인이 모두 단종의 원혼이 빌미가 되었다고 믿었다. 영월 지역민들은 국가의 공식적인 치제에 만족하지 않고 일반 백성들과 종교적으로 맺어지고 싶은 단종의 바람이 그러한 흉사를 유발시켰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성황사의 후신인 영모전(永慕殿)이 건립되고, 단종은 지역신령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단종은 영월 일대에서 오늘날까지 마을의 신령 또는 무신(巫神)으로 숭배되고 있다. 영월에는 “인간이 단종을 보살피지 않으면 도깨비가 보살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종과 신적 존재들의 관계가 밀접하다.

영월에서의 단종 숭배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사후에 태백산의 산신이 되어서 갔기에 태백산 일대에서 그를 태백산신으로 관념하는 것과 영월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지역의 마을들에서 단종을 주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태백산은 이 지역의 명산으로서 조선 전기부터 현재까지 영산(靈山)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영월에서 활동하는 강신무(降神巫)는 일 년에 수차례나 이 산에서 ‘산맞이’를 한다. 이곳에는 무당이 단종의 현몽을 받아 세웠다는 단종대왕비각이 있다. 단종이 태백산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그곳에서 기도하는 무속인들에게 재인식되고 있다. 영월에 거주하는 무당들은 단종을 몸주로 모시거나 굿을 할 때 단종을 주된 신으로 청배하는 일이 많다. 이들에게 있어 단종은 중요한 신령이어서 이들은 굿을 통하여 영월의 지역민들에게 단종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켜 간다.

단종을 모시는 마을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영월군, 태백시, 봉화군 일대에 분포한다. 그 마을들에는 단종이 생존 시에 어떤 형태로든 마을과 연관을 맺었음을 강조한다. 단종이 마을에 들러 잠시 쉬었다거나 그가 띄운 연이 마을에 닿았다거나 하는 등의 당설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영월 지역에서 마을신, 무신으로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한다. 영월 지역민들은 혼인이나 회갑 잔치를 치른 후에 청령포에 들러 단종유지비각 앞에서 모든 일이 잘 치러졌음을 고한다. 이뿐 아니라 단종대왕이라 불러서 항상 경의를 나타내는 생활습관도 있다. 이처럼 영월 지역에서 단종은 신앙생활뿐 아니라 의례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하는 살아 있는 신령으로 존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장릉에 향을 사르며 (엄흥룡, 단종제위원회, 1996)
단종의 신격화 과정과 그 의미 (김효경, 민속학연구 5, 국립민속박물관, 1998)

단종

단종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신

집필자 김효경(金孝慶)
갱신일 2016-10-27

정의

조선의 제6대 임금.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하여 무속에서 섬기는 신(神)이기도 하다. 8세에 왕세손으로 봉해져서, 문종이 훙(薨)한 뒤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창덕궁에 거처한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군(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유배 중에 또 다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 당한다.

내용

정변(政變)에 희생된 비운의 왕이라는 평가만이 남아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졌으나 단종(1441~1457)은 역사의 이면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아 숨쉬는 신령으로 존재하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이자 또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영월 일대의 지역민들은 그를 마을신이나 무신(巫神)으로 모시고 있다. 단종이 신령으로 좌정하게 된 것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에 토대한다. 그는 왕의 신분으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파했던 당대의 사람들이나 후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억울하고 외로운 영혼은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활하였다. 생물학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다. 단종의 비극적인 삶은 양위(讓位)로부터 비롯되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아파하는 계기는 그의 유배생활에서 비롯되었다. 단종이 신격화되는 것은 그의 유배 길과 유배생활에서 잘 드러난다. 유배 자체가 신격화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영월에서의 유배생활은 단종과 지역민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기능하였고, 다른 지역보다 단종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영월 지역민들에게 있어서 단종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간직될 수 있었다. 한양으로부터 영월에 이르는 유배 길에는 도처에 단종과 관련한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비록 기록되지는 않은 역사이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출발지인 서울의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화양정(華陽亭)에는 그가 유배 길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이 깃든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필두로 영월에 이르기까지 곳곳에는 단종의 유배와 관련한 전설과 지명이 전한다. 영월에서의 유배생활 역시 백성들의 관심과 슬픔으로 이어진다. 첫 유배지인 청령포(淸泠浦)는 토사가 퇴적되어 생긴 섬으로, 배를 이용해서만이 왕래할 수 있는 매우 험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단종은 구들장도 없는 마루를 설치하고 그 위에 돗자리만 깐 투막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홍수로 피해를 보고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갔다. 이 홍수에 대해서는 단순한 집중 호우가 아니라 어떤 신의(神意)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단종이 유배되자 그의 외조모인 화산(花山)부인 최씨가 무당 용안 등을 거느리고 영월에 내려와 단종을 위한 굿을 하였는데 굿이 끝나는 날 큰비가 와서 청령포가 침수되었으며, 그 결과 단종은 영월부중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관풍헌에서는 비교적 편안하고 개방된 생활을 하였다. 단종에게 과실을 바치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실제로 추익한(秋益漢, 1383~1457)이 머루를 진상했다. 지역민들은 이미 폐위되었으나 군왕이었던 단종을 지척에서 배알(拜謁)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동정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본격적인 신격화 단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 그를 신격화하는 신앙적 토대로 기능했다. 단종이 신령으로 승화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단종 숙부인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조정에서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3개월 후인 10월 24일(1457)에 단종의 부음(訃音)이 전해진다. 단종이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사사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단종에게 사사를 내리는 과정에서 사신은 왕명 집행을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왕명 집행은 천리(天理)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곧 왕명과 천명 사이에서 사신들은 갈등하였지만 이러한 사신들의 희생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 위해 단종은 순순히 죽음을 택했다. 여기서 백성을 생각하는 성군(聖君) 단종의 모습과 폭군 세조가 대비되면서 그의 죽음은 한층 지역민들에게 아픔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강요된 죽음인 사사와 함께 그의 시신이 유기(遺棄)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차원에서 충격적이다. “숲속에 버려진 후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사람이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다”거나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 같은 가는 열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종의 비참한 삶과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단종이 완전히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신령으로 승화되어 단종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처럼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를 신격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양위, 유배, 강요된 죽음, 시신의 방치 등은 단종이 죽었으되 온전히 죽지 못하는 요인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종의 영혼이 원혼(冤魂)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단종은 신격화를 통하여 이승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섬김으로써 그로부터 가호를 빌 수 있었다. 단종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태백산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죽었던 단종이 죽음을 극복하고서 백마를 타고 태백산신이 되기 위하여 태백산으로 갔다는 전설 등이다. 단종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제사를 받을 수 없었다. 가혹한 핍박 속에서도 단종은 비밀리에 서서히 제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성종 3년(1472)에 죽은 단종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단종을 부처와 동일시하여 그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신비가 강조됨으로써 신격화하는 무리가 생긴 것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출생 자체가 단종을 비상한 인물 또는 부처와 견줄 만한 신적 존재로 믿게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백성의 집단적 표상 및 패배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여 자신들의 영웅을 만들어냈다. 또한 단종은 구체적이 직능을 지닌 신령으로 인식되었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매양 밝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손수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어 향을 피워 빌면 비가 쏟아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종이 기우(祈雨)에 효험을 나타내는 신령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본국가인 조선에서 단종이 비를 내리는 신령으로 인지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매우 비중 있는 신격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에 들어와 재이(災異)를 소멸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국가 차원에서 단종을 제사 지냈고, 민간에서도 단종을 본격적으로 신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지역사례

단종에 대한 신앙은 단종에 대한 공식적인 사묘 건립과 무관하지 않다. 중종 11년(1516)에 공식적인 제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월에는 상식을 벗어난 흉사(凶事)가 일어났다. 중종 36년(1541)에 영월에 부임한 군수가 7개월간 3명이나 사망하고, 전염병이 유난히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영월 지역민들은 이러한 흉사의 원인이 모두 단종의 원혼이 빌미가 되었다고 믿었다. 영월 지역민들은 국가의 공식적인 치제에 만족하지 않고 일반 백성들과 종교적으로 맺어지고 싶은 단종의 바람이 그러한 흉사를 유발시켰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성황사의 후신인 영모전(永慕殿)이 건립되고, 단종은 지역신령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단종은 영월 일대에서 오늘날까지 마을의 신령 또는 무신(巫神)으로 숭배되고 있다. 영월에는 “인간이 단종을 보살피지 않으면 도깨비가 보살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종과 신적 존재들의 관계가 밀접하다. 영월에서의 단종 숭배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사후에 태백산의 산신이 되어서 갔기에 태백산 일대에서 그를 태백산신으로 관념하는 것과 영월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지역의 마을들에서 단종을 주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태백산은 이 지역의 명산으로서 조선 전기부터 현재까지 영산(靈山)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영월에서 활동하는 강신무(降神巫)는 일 년에 수차례나 이 산에서 ‘산맞이’를 한다. 이곳에는 무당이 단종의 현몽을 받아 세웠다는 단종대왕비각이 있다. 단종이 태백산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그곳에서 기도하는 무속인들에게 재인식되고 있다. 영월에 거주하는 무당들은 단종을 몸주로 모시거나 굿을 할 때 단종을 주된 신으로 청배하는 일이 많다. 이들에게 있어 단종은 중요한 신령이어서 이들은 굿을 통하여 영월의 지역민들에게 단종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켜 간다. 단종을 모시는 마을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영월군, 태백시, 봉화군 일대에 분포한다. 그 마을들에는 단종이 생존 시에 어떤 형태로든 마을과 연관을 맺었음을 강조한다. 단종이 마을에 들러 잠시 쉬었다거나 그가 띄운 연이 마을에 닿았다거나 하는 등의 당설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영월 지역에서 마을신, 무신으로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한다. 영월 지역민들은 혼인이나 회갑 잔치를 치른 후에 청령포에 들러 단종유지비각 앞에서 모든 일이 잘 치러졌음을 고한다. 이뿐 아니라 단종대왕이라 불러서 항상 경의를 나타내는 생활습관도 있다. 이처럼 영월 지역에서 단종은 신앙생활뿐 아니라 의례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하는 살아 있는 신령으로 존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장릉에 향을 사르며 (엄흥룡, 단종제위원회, 1996)단종의 신격화 과정과 그 의미 (김효경, 민속학연구 5, 국립민속박물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