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호랑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정병모(鄭炳模)
갱신일 2017-02-09

정의

호랑이와 까치를 함께 그린 그림.

역사

까치호랑이를 한자로 호작도虎鵲圖 혹은 작호도鵲虎圖로 번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명칭은 기록상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조선시대에는 호도虎圖 혹은 맹호도猛虎圖라고 했다.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알려진 까치호랑이는 그 도상이 원나라 및 명나라 호랑이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명나라의 호랑이 그림인 유호도乳虎圖 또는 자모호도子母虎圖가 임진왜란 전후에 조선에 전해지면서 후대에 까치호랑이란 한국적인 그림이 정립된 것이다.
17세기 명나라풍으로 그려진 호랑이 그림을 보면, 배경에 까치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호랑이 그림에서 까치는 여러 배경 중 하나로서 선택 사항일 뿐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 들여와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도>는 까치가 등장한 17세기 호랑이 그림의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호랑이 그림은 까치 없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삼았다. 당시 호랑이 그림을 보면 이원찬李元粲처럼 명나라 호랑이 그림의 화풍을 충실하게 재현한 화가가 있는 반면, 이정李楨, 1578~1607처럼 한국적인 그림으로 탈바꿈을 시도한 화가도 있다. 명나라 화풍을 따른 그림은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그림은 배경이 약화되고 평면화되고 추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내용

한국화된 호랑이 그림은 김홍도에 와서 다시 한번 새롭게 변신하게 된다. 당시 화단을 지배한 사실주의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아 명나라식의 사실적인 화풍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화풍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김홍도와 그의 스승인 강세황이 그린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에서는 까치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18세기 호랑이 그림의 특색을 볼 수 있는 예다. 호랑이의 표현이 매우 극적이고 사실적이다. 꼬리를 곧추세우고 등을 올리고 가만히 얼굴을 돌려 눈에 노란 불을 켜고 앞을 응시하며 여차하면 공격하기 일보 직전의 긴박한 순간을 표현했다. 터럭 하나하나를 세면서 그린 듯 세밀한 묘사라는 점에서는 명나라 호랑이 그림과 별 차이가 없지만, 명나라 그림의 호랑이 터럭 표현은 밍크담요와 같이 부드러운 반면, 김홍도 그림의 호랑이 터럭 표현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렇지만 배경은 명나라 회화와 달리 매우 간략화되어 운치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19세기에는 민화 호랑이 그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배경에 까치가 등장하는 경우가 급격히 증가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까치가 단순한 배경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호랑이와 까치의 관계가 적극적으로 설정된다. 일본민예관 소장 <까치호랑이>를 보면, 까치와 호랑이가 아예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맞서고 있다. 호랑이는 전체 화면의 4/5에 해당하는 공간을 차지하고, 까치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소나무에 간신히 깃들여져 있다. 호랑이는 눈에 노란 불을 켜고 붉은 입을 벌리며 위협을 하고 있다. 하지만 까치는 이에 질세라 부리를 한껏 벌리고 꼬리를 높이 세우고 호랑이와 당당히 맞서고 있다. 둘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만일 호랑이가 덤비면, 까치는 날아가 버리면 그뿐이다.
또한 호랑이 그림에서 까치의 존재가 점점 부가될 뿐만 아니라 까치와 호랑이의 대립도 점점 격렬해졌다. 경기대학교 박물관 소장 <까치호랑이>에서는 호랑이가 가다가 돌아서서 붉은 입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까치를 위협하고 있다. 호랑이는 포기하고 돌아섰다가 밀려오는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아본 것이다. 그렇다고 쉽사리 물러설 까치가 아니다. 여전히 몸을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까치는 명나라 호랑이 그림처럼 단순히 배경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호랑이와 맞대응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호랑이와 까치의 관계는 역전된다. 호랑이는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반면, 까치는 오히려 당당하게 묘사된다. 바보호랑이의 등장이다. 갑자기 까치가 그림을 주도하는 양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 덕분에 호랑이는 우리와 더욱더 친근한 캐릭터로 바뀌게 되었다. 호랑이의 맹수성을 거세시켜 우리가 접근하기 편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
일본 개인 소장 <까치호랑이>에서는 호랑이가 사팔뜨기로 표현되고, 까치는 더욱당당해진 모습으로 호랑이에게 덤벼들고 있다. 교토 고려미술관에 소장된 <까치호랑이>에서는 까치가 마누라처럼 바가지를 긁자 호랑이는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호랑이 얼굴의 표현은 피카소의 큐비즘처럼 정면과 측면의 시점이 교묘하게 조합되어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까치호랑이>에서는 호랑이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격하되었다. 붉은 입 사이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득이지만 머리는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 모습이고,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백수의 왕으로서 위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호랑이와 까치는 늘 긴장관계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까치호랑이>에서는 호랑이와 까치의 관계가 유난히 좋아 보인다.
그림 위쪽 중앙에 적혀 있는 “호랑이가 남산에서 부르짖으니 까치들이 모두 모여들었다[虎嘯南山, 群鵲都會].”라는 구절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화면에 가득하다. 어미 호랑이는 속눈썹을 예쁘게 치장하고 밝게 웃으며 발톱은 솜방망이처럼 거세되어 있다. 까치들은 긴장을 풀고 호랑이의 부름에 응하고 있다. 밝고 명랑하고 유쾌한 호랑이 그림인 것이다. 이 그림은 도식적인 표현과 장식적인 패턴이 두드러진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거세된 발톱에서는 호랑이의 맹수성보다는 인간미가 넘치는 친근감이 풍겨나고, 패턴화된 호랑이의 무늬에서는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일본 세리자와케이스케 미술관에 소장된 <호랑이 가족>을 보면, 명나라유호도에서 연원한 형식이지만 그 표현은 도리어 민화적이다. 어미와 새끼들이 함께 노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언제나 보는 이에게 따뜻한 정감을 안겨 준다. 어미 호랑이를 중심으로 한 마리는 등에 타고 다른 두 마리는 땅에서 놀고 있는 호랑이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그림은 단순히 정감을 나타나는데 그치지 않고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호랑이의 눈은 술에 취한 듯 뱅글뱅글 돌고 있고, 치아도 매우 부실하여 백수의 왕으로서 면모는 찾아볼 길이 없다. 줄무늬는 일정한 패턴으로 단순화되고 어린아이 그림과 같이 천진난만하게 표현되어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형 호랑이 그림이 유행했다. 대표적인 예가 <수기맹호도睡起猛虎圖>(개인 소장)이다. 이는 잠에서 깨어난 맹호도란 뜻이다. 이는 일제에 의해 짓밟힌 민족의 자존심을 호랑이를 통해 일으켜 세우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일제에는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렸다는 경고의 메시지와 더불어 일제 침략에 무력함을 보인 민족의 정기를 일깨우려는 간절함이 이 호랑이 이미지에 서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황해도 무속화에도 까치호랑이가 있다. 소나무 위에는 까치 두 마리가 깃들어 있고, 그 아래에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영락없이 민화 까치호랑이의 구성이다. 우스꽝스러운 표현도 민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이 그림은 까치호랑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서낭신을 그린 종교화이다. 서낭신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서낭신이 산신신앙과 연관이 깊기 때문에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호랑이는 서낭신을 대표하고, 까치는 신의 메신저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나무가 해와 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나무는 여느 소나무가 아니라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신목神木이요, 우주목宇宙木이요, 하늘사다리인 것이다. 이 무속화에는 우리 민족이 숭상하는 태양숭배사상이 담겨 있다. 서민의 간절한 소망은 평범한 이미지를 통해 우주의 중심에 맞닿아 있다.
까치호랑이를 구성하는 호랑이와 까치와 소나무는 한국인이 매우 좋아하는 소재이다. 호랑이는 한국인과 애틋한 관계가 있다. 소나무는 한국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며, 까치는 복을 가져온다고 하여 한국인이 좋아하는 새이다. 그러한 이유로 까치호랑이는 그동안 한국 민화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처럼 호랑이에 까치가 등장하는 그림은 중국 원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표범과 까치가 함께 그려지는 그림은 표豹와 보報가 발음이 비슷하고 까치가 새 소식을 상징하기 때문에 보희報喜, 즉 새 소식을 전하는 길상의 그림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민화 까치호랑이에서는 이러한 상징과 더불어 당시 사회를 풍자하는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그렇기에 호랑이와 까치가 싸우거나 화해하는 인간적인 이야기로 그려지는 것이다. 악귀를 쫓는 벽사의 상징 호랑이가 ‘바보 호랑이’로 전락하고, 새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는 더욱 당당해진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풍자이다. 호랑이는 양반이나 권력을 가진 관리를 상징하고, 까치는 서민을 대표한다. 까치가 호랑이에게 대드는 구성을 통해 서민들은 신분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당시 서민들 사이에는 <까치호랑이 설화>가 유행했는데, 그 내용은 까치가 지혜로 힘센 호랑이를 골탕 먹임으로써 신분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억울함과 푸대접을 항변하는 것이다. 급격하게 나빠진 까치와 호랑이의 관계 속에서 서민화가의 사회의식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왜 호랑이와 까치가 이처럼 대립의 각을 세운 것일까? 그 의문은 19세기의 역사 속에서 풀어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홍경래의 난과 동학혁명과 같은 민란이 빈번해지고 서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결국에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오던 신분제도가 무너지기에 이른다. 서민들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는 사회적 변화가 까치호랑이 속에 반영된 것이다.

특징 및 의의

17세기 단순한 배경이었던 까치가 등장하는 호랑이 그림이 19세기 민화에 와서는 ‘까치호랑이’라고 따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대거 유행하게 되었다. 이는 그림 속 호랑이와 까치의 이야기를 동물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로 환원시킨 민화 특유의 스토리텔링적 속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대립관계 혹은 우호관계로 설정하면서 당시 사회를 풍자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를 거세시켜 바보호랑이로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풍자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예이다. 해학을 통해 강자의 권위를 단숨에 끌어내림으로써 평등을 지향하는 서민의 세계관을 표출하고 있다.
미술사학자 존 코벨John Covell, 1910~1996은 민화 호랑이의 양면성에 대해 “무시무시한 맹수에 대한 존경심을 뒤집어 우스운 호랑이로 표현한 능력이야말로 한국 미술사의 한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고 잡아가는 두려운 존재이자 산신같은 신적인 존재이면서 반대로 쾌활하고 멍청하기도 한 인간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호랑이에 대한 존재가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그것에 대한 반향도 클 수밖에 없다. 민화작가는 무서운 존재에 대한 반감을 직접 표출하기보다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참고문헌

개인소장의 출산호작도-까치호랑이 그림의 원류(홍선표, 미술사논단9, 한국미술연구소, 1999), 민화 용호도의 도상적 연원과 변모양상(정병모, 강좌 미술사37, 한국미술사연구소, 2011), 조선 중·후기 호도의 유형과 도상-기년작을 중심으로(윤진영, 장서각28,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한국 호랑이(김호근 외, 열화당, 1991), Chinese TigerPainting and its Symbolic Meanings, Part I: Tiger Painting and theSung Dynasty(Houmei Sung, National Palace Museum Bulletin,v.33 no4, 1998), Tiger with Cubs: A Rediscovered Ming CourtPainting(Houmei Sung, Artibus Asiae, v.64 no2, 2004).

까치호랑이

까치호랑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정병모(鄭炳模)
갱신일 2017-02-09

정의

호랑이와 까치를 함께 그린 그림.

역사

까치호랑이를 한자로 호작도虎鵲圖 혹은 작호도鵲虎圖로 번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명칭은 기록상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조선시대에는 호도虎圖 혹은 맹호도猛虎圖라고 했다.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알려진 까치호랑이는 그 도상이 원나라 및 명나라 호랑이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명나라의 호랑이 그림인 유호도乳虎圖 또는 자모호도子母虎圖가 임진왜란 전후에 조선에 전해지면서 후대에 까치호랑이란 한국적인 그림이 정립된 것이다.17세기 명나라풍으로 그려진 호랑이 그림을 보면, 배경에 까치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호랑이 그림에서 까치는 여러 배경 중 하나로서 선택 사항일 뿐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 들여와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는 까치가 등장한 17세기 호랑이 그림의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호랑이 그림은 까치 없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삼았다. 당시 호랑이 그림을 보면 이원찬李元粲처럼 명나라 호랑이 그림의 화풍을 충실하게 재현한 화가가 있는 반면, 이정李楨, 1578~1607처럼 한국적인 그림으로 탈바꿈을 시도한 화가도 있다. 명나라 화풍을 따른 그림은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그림은 배경이 약화되고 평면화되고 추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내용

한국화된 호랑이 그림은 김홍도에 와서 다시 한번 새롭게 변신하게 된다. 당시 화단을 지배한 사실주의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아 명나라식의 사실적인 화풍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화풍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김홍도와 그의 스승인 강세황이 그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에서는 까치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18세기 호랑이 그림의 특색을 볼 수 있는 예다. 호랑이의 표현이 매우 극적이고 사실적이다. 꼬리를 곧추세우고 등을 올리고 가만히 얼굴을 돌려 눈에 노란 불을 켜고 앞을 응시하며 여차하면 공격하기 일보 직전의 긴박한 순간을 표현했다. 터럭 하나하나를 세면서 그린 듯 세밀한 묘사라는 점에서는 명나라 호랑이 그림과 별 차이가 없지만, 명나라 그림의 호랑이 터럭 표현은 밍크담요와 같이 부드러운 반면, 김홍도 그림의 호랑이 터럭 표현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렇지만 배경은 명나라 회화와 달리 매우 간략화되어 운치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19세기에는 민화 호랑이 그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배경에 까치가 등장하는 경우가 급격히 증가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까치가 단순한 배경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호랑이와 까치의 관계가 적극적으로 설정된다. 일본민예관 소장 를 보면, 까치와 호랑이가 아예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맞서고 있다. 호랑이는 전체 화면의 4/5에 해당하는 공간을 차지하고, 까치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소나무에 간신히 깃들여져 있다. 호랑이는 눈에 노란 불을 켜고 붉은 입을 벌리며 위협을 하고 있다. 하지만 까치는 이에 질세라 부리를 한껏 벌리고 꼬리를 높이 세우고 호랑이와 당당히 맞서고 있다. 둘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만일 호랑이가 덤비면, 까치는 날아가 버리면 그뿐이다.또한 호랑이 그림에서 까치의 존재가 점점 부가될 뿐만 아니라 까치와 호랑이의 대립도 점점 격렬해졌다. 경기대학교 박물관 소장 에서는 호랑이가 가다가 돌아서서 붉은 입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까치를 위협하고 있다. 호랑이는 포기하고 돌아섰다가 밀려오는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아본 것이다. 그렇다고 쉽사리 물러설 까치가 아니다. 여전히 몸을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까치는 명나라 호랑이 그림처럼 단순히 배경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호랑이와 맞대응하고 있다.그러다가 결국 호랑이와 까치의 관계는 역전된다. 호랑이는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반면, 까치는 오히려 당당하게 묘사된다. 바보호랑이의 등장이다. 갑자기 까치가 그림을 주도하는 양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 덕분에 호랑이는 우리와 더욱더 친근한 캐릭터로 바뀌게 되었다. 호랑이의 맹수성을 거세시켜 우리가 접근하기 편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일본 개인 소장 에서는 호랑이가 사팔뜨기로 표현되고, 까치는 더욱당당해진 모습으로 호랑이에게 덤벼들고 있다. 교토 고려미술관에 소장된 에서는 까치가 마누라처럼 바가지를 긁자 호랑이는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호랑이 얼굴의 표현은 피카소의 큐비즘처럼 정면과 측면의 시점이 교묘하게 조합되어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에서는 호랑이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격하되었다. 붉은 입 사이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득이지만 머리는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 모습이고,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백수의 왕으로서 위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호랑이와 까치는 늘 긴장관계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에서는 호랑이와 까치의 관계가 유난히 좋아 보인다.그림 위쪽 중앙에 적혀 있는 “호랑이가 남산에서 부르짖으니 까치들이 모두 모여들었다[虎嘯南山, 群鵲都會].”라는 구절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화면에 가득하다. 어미 호랑이는 속눈썹을 예쁘게 치장하고 밝게 웃으며 발톱은 솜방망이처럼 거세되어 있다. 까치들은 긴장을 풀고 호랑이의 부름에 응하고 있다. 밝고 명랑하고 유쾌한 호랑이 그림인 것이다. 이 그림은 도식적인 표현과 장식적인 패턴이 두드러진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거세된 발톱에서는 호랑이의 맹수성보다는 인간미가 넘치는 친근감이 풍겨나고, 패턴화된 호랑이의 무늬에서는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일본 세리자와케이스케 미술관에 소장된 을 보면, 명나라유호도에서 연원한 형식이지만 그 표현은 도리어 민화적이다. 어미와 새끼들이 함께 노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언제나 보는 이에게 따뜻한 정감을 안겨 준다. 어미 호랑이를 중심으로 한 마리는 등에 타고 다른 두 마리는 땅에서 놀고 있는 호랑이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그림은 단순히 정감을 나타나는데 그치지 않고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호랑이의 눈은 술에 취한 듯 뱅글뱅글 돌고 있고, 치아도 매우 부실하여 백수의 왕으로서 면모는 찾아볼 길이 없다. 줄무늬는 일정한 패턴으로 단순화되고 어린아이 그림과 같이 천진난만하게 표현되어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형 호랑이 그림이 유행했다. 대표적인 예가 (개인 소장)이다. 이는 잠에서 깨어난 맹호도란 뜻이다. 이는 일제에 의해 짓밟힌 민족의 자존심을 호랑이를 통해 일으켜 세우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일제에는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렸다는 경고의 메시지와 더불어 일제 침략에 무력함을 보인 민족의 정기를 일깨우려는 간절함이 이 호랑이 이미지에 서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황해도 무속화에도 까치호랑이가 있다. 소나무 위에는 까치 두 마리가 깃들어 있고, 그 아래에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영락없이 민화 까치호랑이의 구성이다. 우스꽝스러운 표현도 민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이 그림은 까치호랑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서낭신을 그린 종교화이다. 서낭신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서낭신이 산신신앙과 연관이 깊기 때문에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호랑이는 서낭신을 대표하고, 까치는 신의 메신저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나무가 해와 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나무는 여느 소나무가 아니라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신목神木이요, 우주목宇宙木이요, 하늘사다리인 것이다. 이 무속화에는 우리 민족이 숭상하는 태양숭배사상이 담겨 있다. 서민의 간절한 소망은 평범한 이미지를 통해 우주의 중심에 맞닿아 있다.까치호랑이를 구성하는 호랑이와 까치와 소나무는 한국인이 매우 좋아하는 소재이다. 호랑이는 한국인과 애틋한 관계가 있다. 소나무는 한국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며, 까치는 복을 가져온다고 하여 한국인이 좋아하는 새이다. 그러한 이유로 까치호랑이는 그동안 한국 민화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처럼 호랑이에 까치가 등장하는 그림은 중국 원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표범과 까치가 함께 그려지는 그림은 표豹와 보報가 발음이 비슷하고 까치가 새 소식을 상징하기 때문에 보희報喜, 즉 새 소식을 전하는 길상의 그림으로 사랑을 받았다.그런데 민화 까치호랑이에서는 이러한 상징과 더불어 당시 사회를 풍자하는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그렇기에 호랑이와 까치가 싸우거나 화해하는 인간적인 이야기로 그려지는 것이다. 악귀를 쫓는 벽사의 상징 호랑이가 ‘바보 호랑이’로 전락하고, 새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는 더욱 당당해진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풍자이다. 호랑이는 양반이나 권력을 가진 관리를 상징하고, 까치는 서민을 대표한다. 까치가 호랑이에게 대드는 구성을 통해 서민들은 신분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당시 서민들 사이에는 가 유행했는데, 그 내용은 까치가 지혜로 힘센 호랑이를 골탕 먹임으로써 신분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억울함과 푸대접을 항변하는 것이다. 급격하게 나빠진 까치와 호랑이의 관계 속에서 서민화가의 사회의식이 날카롭게 번득인다.왜 호랑이와 까치가 이처럼 대립의 각을 세운 것일까? 그 의문은 19세기의 역사 속에서 풀어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홍경래의 난과 동학혁명과 같은 민란이 빈번해지고 서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결국에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오던 신분제도가 무너지기에 이른다. 서민들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는 사회적 변화가 까치호랑이 속에 반영된 것이다.

특징 및 의의

17세기 단순한 배경이었던 까치가 등장하는 호랑이 그림이 19세기 민화에 와서는 ‘까치호랑이’라고 따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대거 유행하게 되었다. 이는 그림 속 호랑이와 까치의 이야기를 동물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로 환원시킨 민화 특유의 스토리텔링적 속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대립관계 혹은 우호관계로 설정하면서 당시 사회를 풍자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를 거세시켜 바보호랑이로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풍자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예이다. 해학을 통해 강자의 권위를 단숨에 끌어내림으로써 평등을 지향하는 서민의 세계관을 표출하고 있다.미술사학자 존 코벨John Covell, 1910~1996은 민화 호랑이의 양면성에 대해 “무시무시한 맹수에 대한 존경심을 뒤집어 우스운 호랑이로 표현한 능력이야말로 한국 미술사의 한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고 잡아가는 두려운 존재이자 산신같은 신적인 존재이면서 반대로 쾌활하고 멍청하기도 한 인간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호랑이에 대한 존재가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그것에 대한 반향도 클 수밖에 없다. 민화작가는 무서운 존재에 대한 반감을 직접 표출하기보다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참고문헌

개인소장의 출산호작도-까치호랑이 그림의 원류(홍선표, 미술사논단9, 한국미술연구소, 1999), 민화 용호도의 도상적 연원과 변모양상(정병모, 강좌 미술사37, 한국미술사연구소, 2011), 조선 중·후기 호도의 유형과 도상-기년작을 중심으로(윤진영, 장서각28,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한국 호랑이(김호근 외, 열화당, 1991), Chinese TigerPainting and its Symbolic Meanings, Part I: Tiger Painting and theSung Dynasty(Houmei Sung, National Palace Museum Bulletin,v.33 no4, 1998), Tiger with Cubs: A Rediscovered Ming CourtPainting(Houmei Sung, Artibus Asiae, v.64 no2,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