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군복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염정하(廉貞夏)
갱신일 2018-10-11

정의

조선 후기 군관과 문무관이 갖추어 입은 군복.

역사

구군복具軍服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군영의 기록인 『훈국등록訓局謄錄』(1747)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외에 『어영청등록御營廳謄錄』(1791), 『훈국총요訓局捴要』(1864~1895) 등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구군복의 의미는 모두 ‘군복을 갖추다’로 해석된다. 20세기 이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유군복지구有軍服之具”로 표기되어 조선시대 군영 기록과 유사하게 해석된다. 이훈종의 『국어학습도보』(1955)에는 ‘군복’이라는 명칭을 먼저 제시하고 그 뒤에 작은 글씨로 ‘구군복’을 함께 적었다. 이후 『국학도감國學圖鑑』(1968)에서는 전립상모를 달고, 동다리전복戰服을 입은 후 팔에 팔찌[韝]를 매고 전대戰帶에 병부兵符와 환도還刀를 달고 손에는 등채를 쥔 모습을 ‘구군복’으로 명시하였다. 일본의 『대한화사전大漢和事典』에는 ‘구具’ 자체에 ‘차림식군복’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조선의 군사 관련 기록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간행한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20)을 비롯하여 문세영文世榮의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38), 정희준의 『조선고어사전朝鮮古語辭典』(1949) 모두에서 ‘구군복’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고, ‘군복’이라는 용어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 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군복 일습을 구군복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에는 조선의 기록을 근거로 구군복을 조선 후기 군복 일습이기보다는 군복을 갖춘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내용 구군복은 전립戰笠, 氈笠을 쓰고, 협수狹袖(동다리)위에 전복이나 괘자掛子(쾌자의 원말)를 입은 후 허리에 전대와 요대腰帶를 두르며, 수화자水靴子를 신고, 동개筒箇·환도·등채·깍지를 갖추어 입은 차림을 의미한다. 계급에 따라 구군복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복식 소재와 장식품의 재료에 차이를 두고 있다.
전립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군병들이 먼저 썼고, 차츰 장관將官과 장교에게도 보급되었다. 품계가 높은 무관이 쓰는 전립은 안올림벙거지로 품질이 좋은 모毛제품으로 공작우孔雀羽·삭모鷺毛와 옥로玉鷺·밀화영密花纓을 달았고, 하졸들이 쓰는 전립은 벙거지 또는 벙테기라 하며 돈모豚毛를 사용하여 만들었고 장식이 없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전립은 고위 계급의 것으로 품질이 좋은 재료로 만들었고, 모자집의 둘레에는 붉은 끈을 모아 둘렀으며, 양쪽에 쌍분이나 매미모양의 밀화를 달았다. 그리고 모정에 정자를 달고 공작미와 상모를 달았다.
협수는 소매가 좁은 포 형태의 옷으로 옆트임과 뒤트임이 있는 형식이다. 여기에 홍수紅袖라는 끝동장식이 있어 동다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동다리는 구전되는 명칭으로 다른 색의 소매가 달린 구성적 특징을 의미한다. 학계에서는 협수와 동다리를 동일하게 본다. 그러나 인조 대와 숙종 대 회화자료의 협수에는 끝동장식이 없기도 하고, 영정조 대는 홍수 외에 다양한 색상의 끝동이 달린 협수가 있어 요즘에는 협수와 동다리는 다른 복식이라는 의견과 협수에서 동다리로 변형된 것이라는 의견 등이 있다. 17세기에서 19세기로 갈수록 협수의 날렵한 소매는 점차 일자형으로 변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1871)에서는 “소매 끝의 붉은색 장식은 ‘홍수紅袖’라 하며 …… 본래는 겨우 몇 치이던 것이 지금은 온 소매에 다 장식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 유물과 회화 등에 나타난 소매에 달린 홍수는 정조 때는 짧은 길이였으나 철종 때는 팔꿈치까지 오는 길이로 늘어났으며, 고종 말기에는 소매 길이 전체가 홍수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구한말로 갈수록 무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협수의 밑단 폭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복에 협수의 소매만을 달아 간소하게 착용하면서 겹쳐 입는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전복이나 괘자는 합임이며, 짧은 고름이나 단추로 여미고, 뒤트임과 옆트임이 있어 활동하기에 편리한 옷이다. 전복과 괘자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 편이며, 기록에 따라서는 같은 옷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한편 요즘 학계에서는 순조 대의 『진작의궤進爵儀軌』(1828)의 전복 도상과 『진찬의궤進饌儀軌』(1829) 괘자 도상에서 전복과 괘자의 형태는 흡사하나 괘자에는 깃이 달린 차이점이 있어 깃이 없는 것은 ‘전복’, 깃이 있는 것은 ‘괘자’라는 의견이 있다. 17세기의 전복은 무가 좁거나, 무가 없이 옆트임이 뒤트임보다 긴 경우가 있다. 18~19세기의 전복은 긴 뒤트임과 짧은 옆트임 그리고 넓은 삼각무이다. 구한말로 갈수록 무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전복의 밑단 폭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화된다.
전대는 협수 위에 전복이나 쾌자를 입고 그 위에 묶어 고정하는 것으로, 요대 위에 두르기도 하였다. 요대보다 좁은 편으로 허리나 가슴에서 한 번 둘러서 매고 앞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전대의 색상은 대부분 남색이며, 홍색도 있었다. 소재는 남방주藍方紬나 남화주藍禾紬 같은 견직물과 청목靑木 같은 무명으로 만들었다. 직선으로 길게 마름질하여 한쪽 끝을 삼각형으로 접은 후 식서 부분이 맞닿게 같은 방법으로 접어 맞닿은 식서 부분을 돌려가며 박기 때문에 통모양이 된다. 허리띠 용도 이외에도 띠 속에 물건을 보관하는 물품 보관용이나 응급처치 시 구급용 붕대 역할도 한다.
요대는 전대 아래에 두르는 것으로 고위 군관과 왕이 사용하였다. 두껍게 접은 종이를 검은빛의 우단이나 비단으로 싼 요대는 가슴에 둘러 조였다. 정조의 대렴의에 금선용문단요대金線龍紋緞腰帶가 포함되었고, 철종의 군복본에서 길상문양이 있는 요대를 볼 수 있다. 정조 대 파총의 사급 기록에는 천청만자문요대天靑萬字紋腰帶가 있어, 요대 문양에 계급의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수화자는 목화木靴와 비슷한 형태로 목이 긴 신발이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신바닥에 기름을 오랫동안 먹인 비단이나 가죽 또는 종이를 깔아 만들며, 전지에 나갈 때, 비가 올 때, 진영에 나갈 때 착용하였다.
동개는 화살집과 활을 넣는 통을 한 줄로 묶어 왼편 어깨에 매게줄로 연결된 제구이다. 환도는 한쪽에만 날을 세운 칼로 군도軍刀이다. 등채는 채찍 달린 의장용 지휘봉이며, 깍지는 활을 쏠 때 시위를 잡아당기기 위하여 엄지손가락의 아랫마디에 끼는 기구이다.

특징 및 의의

군관軍官과 무관武官은 행행行幸할 때 군복을 갖추어 입었으며, 왕을 측근에서 호위하거나 전쟁, 군사훈련 등의 상황에서는 갑주甲冑 속에 군복을 받쳐 입었으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군복 위에 단령團領을 덧입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1873)에 따르면 “정조의 경우 화성 행행 시 군복을 착용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왕도 행차할 때 군복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군복을 갖추어 입는 구군복은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군사복식으로 영조 대 이후 군복에 대한 규정이 점차 정립되었다. 정조 대에는 군복과 융복戎服의 혼용으로 인한 폐단을 두고 각 신하 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군복 통용 문제를 보류하는 선에서 논쟁을 마무리하였다. 고종 대에는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서 군복 구성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1883년(고종 20)에 열강의 침략 같은 외세의 영향으로 서울과 지방의 모든 융복을 군복으로 바꾸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육군 복장 규칙을 반포하여 더는 군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大典會通, 萬機要覽, 承政院日記, 御營廳謄, 與猶堂全書, 朝鮮王朝實錄, 訓局謄錄, 訓局捴要, 국학도감(이훈종, 일조각, 1968), 정조시대의 군사복식과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박가영·이은주, 한복문화7-3, 한복문화학회, 2004), 조선 후기 오군영의 군사복식에 관한 연구(염정하,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한국군복의 변천사 연구(김정자, 민속원, 1998), 한국복식사전(강순제 외, 민속원, 2015), 한민족역사문화도감-의생활(국립민속박물관, 2005), 문화재청(cha.go.kr).

구군복

구군복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염정하(廉貞夏)
갱신일 2018-10-11

정의

조선 후기 군관과 문무관이 갖추어 입은 군복.

역사

구군복具軍服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군영의 기록인 『훈국등록訓局謄錄』(1747)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외에 『어영청등록御營廳謄錄』(1791), 『훈국총요訓局捴要』(1864~1895) 등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구군복의 의미는 모두 ‘군복을 갖추다’로 해석된다. 20세기 이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유군복지구有軍服之具”로 표기되어 조선시대 군영 기록과 유사하게 해석된다. 이훈종의 『국어학습도보』(1955)에는 ‘군복’이라는 명칭을 먼저 제시하고 그 뒤에 작은 글씨로 ‘구군복’을 함께 적었다. 이후 『국학도감國學圖鑑』(1968)에서는 전립에 상모를 달고, 동다리와 전복戰服을 입은 후 팔에 팔찌[韝]를 매고 전대戰帶에 병부兵符와 환도還刀를 달고 손에는 등채를 쥔 모습을 ‘구군복’으로 명시하였다. 일본의 『대한화사전大漢和事典』에는 ‘구具’ 자체에 ‘차림식군복’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조선의 군사 관련 기록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간행한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20)을 비롯하여 문세영文世榮의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38), 정희준의 『조선고어사전朝鮮古語辭典』(1949) 모두에서 ‘구군복’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고, ‘군복’이라는 용어만을 확인할 수 있다.기존 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군복 일습을 구군복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에는 조선의 기록을 근거로 구군복을 조선 후기 군복 일습이기보다는 군복을 갖춘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내용 구군복은 전립戰笠, 氈笠을 쓰고, 협수狹袖(동다리)위에 전복이나 괘자掛子(쾌자의 원말)를 입은 후 허리에 전대와 요대腰帶를 두르며, 수화자水靴子를 신고, 동개筒箇·환도·등채·깍지를 갖추어 입은 차림을 의미한다. 계급에 따라 구군복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복식 소재와 장식품의 재료에 차이를 두고 있다.전립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군병들이 먼저 썼고, 차츰 장관將官과 장교에게도 보급되었다. 품계가 높은 무관이 쓰는 전립은 안올림벙거지로 품질이 좋은 모毛제품으로 공작우孔雀羽·삭모鷺毛와 옥로玉鷺·밀화영密花纓을 달았고, 하졸들이 쓰는 전립은 벙거지 또는 벙테기라 하며 돈모豚毛를 사용하여 만들었고 장식이 없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전립은 고위 계급의 것으로 품질이 좋은 재료로 만들었고, 모자집의 둘레에는 붉은 끈을 모아 둘렀으며, 양쪽에 쌍분이나 매미모양의 밀화를 달았다. 그리고 모정에 정자를 달고 공작미와 상모를 달았다.협수는 소매가 좁은 포 형태의 옷으로 옆트임과 뒤트임이 있는 형식이다. 여기에 홍수紅袖라는 끝동장식이 있어 동다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동다리는 구전되는 명칭으로 다른 색의 소매가 달린 구성적 특징을 의미한다. 학계에서는 협수와 동다리를 동일하게 본다. 그러나 인조 대와 숙종 대 회화자료의 협수에는 끝동장식이 없기도 하고, 영정조 대는 홍수 외에 다양한 색상의 끝동이 달린 협수가 있어 요즘에는 협수와 동다리는 다른 복식이라는 의견과 협수에서 동다리로 변형된 것이라는 의견 등이 있다. 17세기에서 19세기로 갈수록 협수의 날렵한 소매는 점차 일자형으로 변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1871)에서는 “소매 끝의 붉은색 장식은 ‘홍수紅袖’라 하며 …… 본래는 겨우 몇 치이던 것이 지금은 온 소매에 다 장식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 유물과 회화 등에 나타난 소매에 달린 홍수는 정조 때는 짧은 길이였으나 철종 때는 팔꿈치까지 오는 길이로 늘어났으며, 고종 말기에는 소매 길이 전체가 홍수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구한말로 갈수록 무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협수의 밑단 폭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복에 협수의 소매만을 달아 간소하게 착용하면서 겹쳐 입는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전복이나 괘자는 합임이며, 짧은 고름이나 단추로 여미고, 뒤트임과 옆트임이 있어 활동하기에 편리한 옷이다. 전복과 괘자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 편이며, 기록에 따라서는 같은 옷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한편 요즘 학계에서는 순조 대의 『진작의궤進爵儀軌』(1828)의 전복 도상과 『진찬의궤進饌儀軌』(1829) 괘자 도상에서 전복과 괘자의 형태는 흡사하나 괘자에는 깃이 달린 차이점이 있어 깃이 없는 것은 ‘전복’, 깃이 있는 것은 ‘괘자’라는 의견이 있다. 17세기의 전복은 무가 좁거나, 무가 없이 옆트임이 뒤트임보다 긴 경우가 있다. 18~19세기의 전복은 긴 뒤트임과 짧은 옆트임 그리고 넓은 삼각무이다. 구한말로 갈수록 무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전복의 밑단 폭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화된다.전대는 협수 위에 전복이나 쾌자를 입고 그 위에 묶어 고정하는 것으로, 요대 위에 두르기도 하였다. 요대보다 좁은 편으로 허리나 가슴에서 한 번 둘러서 매고 앞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전대의 색상은 대부분 남색이며, 홍색도 있었다. 소재는 남방주藍方紬나 남화주藍禾紬 같은 견직물과 청목靑木 같은 무명으로 만들었다. 직선으로 길게 마름질하여 한쪽 끝을 삼각형으로 접은 후 식서 부분이 맞닿게 같은 방법으로 접어 맞닿은 식서 부분을 돌려가며 박기 때문에 통모양이 된다. 허리띠 용도 이외에도 띠 속에 물건을 보관하는 물품 보관용이나 응급처치 시 구급용 붕대 역할도 한다.요대는 전대 아래에 두르는 것으로 고위 군관과 왕이 사용하였다. 두껍게 접은 종이를 검은빛의 우단이나 비단으로 싼 요대는 가슴에 둘러 조였다. 정조의 대렴의에 금선용문단요대金線龍紋緞腰帶가 포함되었고, 철종의 군복본에서 길상문양이 있는 요대를 볼 수 있다. 정조 대 파총의 사급 기록에는 천청만자문요대天靑萬字紋腰帶가 있어, 요대 문양에 계급의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수화자는 목화木靴와 비슷한 형태로 목이 긴 신발이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신바닥에 기름을 오랫동안 먹인 비단이나 가죽 또는 종이를 깔아 만들며, 전지에 나갈 때, 비가 올 때, 진영에 나갈 때 착용하였다.동개는 화살집과 활을 넣는 통을 한 줄로 묶어 왼편 어깨에 매게줄로 연결된 제구이다. 환도는 한쪽에만 날을 세운 칼로 군도軍刀이다. 등채는 채찍 달린 의장용 지휘봉이며, 깍지는 활을 쏠 때 시위를 잡아당기기 위하여 엄지손가락의 아랫마디에 끼는 기구이다.

특징 및 의의

군관軍官과 무관武官은 행행行幸할 때 군복을 갖추어 입었으며, 왕을 측근에서 호위하거나 전쟁, 군사훈련 등의 상황에서는 갑주甲冑 속에 군복을 받쳐 입었으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군복 위에 단령團領을 덧입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1873)에 따르면 “정조의 경우 화성 행행 시 군복을 착용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왕도 행차할 때 군복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군복을 갖추어 입는 구군복은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군사복식으로 영조 대 이후 군복에 대한 규정이 점차 정립되었다. 정조 대에는 군복과 융복戎服의 혼용으로 인한 폐단을 두고 각 신하 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군복 통용 문제를 보류하는 선에서 논쟁을 마무리하였다. 고종 대에는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서 군복 구성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1883년(고종 20)에 열강의 침략 같은 외세의 영향으로 서울과 지방의 모든 융복을 군복으로 바꾸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육군 복장 규칙을 반포하여 더는 군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大典會通, 萬機要覽, 承政院日記, 御營廳謄, 與猶堂全書, 朝鮮王朝實錄, 訓局謄錄, 訓局捴要, 국학도감(이훈종, 일조각, 1968), 정조시대의 군사복식과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박가영·이은주, 한복문화7-3, 한복문화학회, 2004), 조선 후기 오군영의 군사복식에 관한 연구(염정하,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한국군복의 변천사 연구(김정자, 민속원, 1998), 한국복식사전(강순제 외, 민속원, 2015), 한민족역사문화도감-의생활(국립민속박물관, 2005), 문화재청(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