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한자명

冠婚喪祭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관례|계례

집필자 김시덕(金時德)
갱신일 2018-10-12

정의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거쳐야 하는 대표적인 네가지 의례인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를 총칭하는 말.

역사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말은 『예기禮記』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그리고 여러 예서禮書에서 이미 관혼상제를 기본 의례로 다루고 있어 이 용어의 역사가 유구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유교식과 유사한 혼례와 상례가 행해졌으나 유교식 관혼상제의 개념이 확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혼례와 상례는 중국의 예禮를 원용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들이있지만, 그 형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예기 등의 고전적인 의례의 일부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 서옥제壻屋制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풍속을, 동옥저東沃沮의 10세 혼인약속 기록으로 혼인의 사전 약속 및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신랑이 백마를 타고, 초례 때 산 닭을 올리고 남녀가 서로 절을 하며, 예식 후에는 잔치를 하였다는 기록에서 유교식 혼례와 유사한 의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등의 기록을 보면, 상복을 입는 기간과 장사 지내는 기간이 정해져있었다. 동옥저에서는 곽槨을 사용하여 복차장複次葬을 하였으나, 다른 나라에서는 곽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신라에서는 지증왕 5년에 순장殉葬을 금하고, 상복법을 제정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혼인을 하면 곧바로 장사에 사용할 물건을 준비하고, 빈장을 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풍악을 울리며 장사를 지냈다. 또한 상이 나면 곡을 하고 부모와 남편은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등의 상기喪期가 정해져 있었다. 백제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풍속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사한 상례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도 유교식과 유사한 혼례, 상례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고려 초에 송宋에서 대묘당도大廟堂圖, 제기도祭器圖 등 유교식 의례 관련 그림을 가져오고 성종대成宗代에 국가의 주요 제도를 유교식으로 개편함으로써, 중국의 유교 의례가 본격적으로 수입된다. 965년(광종16)에 세자에게 원복元服을 입혔다는 기록으로 광종光宗·예종睿宗·의종대毅宗代에 관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혼례의 자세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자유혼이 많았고 예물을 주고받거나 술이나 쌀로 서로 호의를 교환하였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있었다. 고려 때에는 삼년상의 제도가 있었으나 역월제易月制를 적용하여 27일에 대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985년(성종4)에는 오복제도에 따라 복제를 정하고, 이에 따른 휴가 제도를 정비하여 체계적인 상례를 치렀던 것으로보인다. 경종대景宗代에는 부모 기일에 1일 낮과 2일 밤의 휴가를 주고, 성종成宗·헌종獻宗·문종文宗·명종대明宗代에는 조부모의 기일, 처부모의 기일은 물론 삭망제, 시제時祭(2일간)에도 휴가를 주었다. 이와 함께 절에 빈소를 마련하고 화장하는 등 불교식 상례가 번창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상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교식 상례나 불교식 상례는 상류층에서만 이루어지고 일반인들은 체계적인 상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는 거의 전 시대에 걸쳐 유교식 상례로 전환을 시도했던, 고례古禮의 모방시대였다.

고려 말기 신진 사대부들이 『가례家禮』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상례와 제례를 중심으로 유교식 관혼상제가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제도는 물론 관혼상제 역시 유교식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또한,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와 불교의례를 억압하고 승려를 혁파함과 동시에, 유교식 관혼상제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펴나간다. 유교식 의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는 일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신진사대부들의 몫이었다. 그 결과 16세기 초반부터 이미 조선식으로 저술된 예서禮書들이 등장한다. 정책적으로도 7품 이하 관료에게 의무적으로 『가례』를 시험 보게 하는 등 유교식 의례 보급에 전력한다. 특히,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1394),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 『경국대전經國大典』(1485) 등 법전을 편찬하여 정책적으로 모든 제도와 의례를 유교식으로 일원화해 나간다.

16~17세기가 되면 성리학자들의 예학 연구와 실학자의 실천예학 연구 등에 힘입어 한국인의 일생의례는 유교식 관혼상제라는 이름으로 일반화하기에 이른다. 200여 종이 넘는 예서가 출간되었다는 것은 유교식 관혼상제에 그만큼 관심이 컸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관혼상제는 『가례』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게 수정하면서 수용한다. 『가례』가 유교식 관혼상제의 법전처럼 ‘고정된 규정’이었다면, 이를 모본으로 하여 조선의 상황에 맞게 수정하여 저술한 예서들은 ‘비고정적 변화’였던 것이다. 여기서 변화란 중국에서 만들어진 유교식 관혼상제가 조선의 사정과 환경에 적합한 유교식 관혼상제로 재탄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관례가 보편적인 성년식이 되고, 혼례는 친영親迎과 반친영半親迎을 수용함과 동시에 주자朱子 사례四禮와 주육례周六禮를 동시에 받아들인다. 상례는 삼년상을 기본으로 삼았고, 제례는 사당에 신주를 모시사대봉사를 하는 등 유교식 관혼상제가 조선의 의례문화로 완전히 정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개항과 함께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관혼상제 역시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 말기 단발령 시행으로 관례와 계례筓禮가 쇠퇴하고, 전통 혼례 대신에 면사포와 웨딩드레스가 상징인 서구의 예배당 결혼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일제강점기가 되면 더욱 심화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혼상제는 일제의 탄압과 근대화의 영향으로 문화적 전통의 격변이라는 큰 위기를 맞는다. 혼례에서는 전통 혼례와 예배당 결혼식에 일본식 예식장 혼례가 도입된다. 제사는 사대봉사가 약화하고, 상례에는 일본식 화장을 도입하는 등 변화의 물결이 밀려든다. 급기야 1934년 조선총독부가 근대화를 명분으로 의례의 간소화를 강제하는 「의례준칙」을 공포함으로써 관혼상제 역시 바뀌는데, 관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혼·상·제례만을 의례로 인정하였다. 혼례에는 약혼約婚을 강조하고, 예배당이나 신사, 절에서도 혼례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상례는 기존의 삼년상을 축소하여 14일, 복을 입는 기간은 최대 2년으로 하였고, 양복을 상복으로 제시하였으며 , 기존의 견전遣奠을 없애고 단체장에서나 볼 수 있는 영결식永訣式을 발인發靷 전에 행하도록 하였다. 제사는 기제사묘제만을 인정하여 간소화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을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따랐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사례편람四禮便覽』(1844)이 1900년에 개정·증보되고, 이후에도 계속 출판되는 것을 보면 유교식 관혼상제의 문화적 전통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969년「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1969)과 함께 「가정의례준칙」이 공포되고, 1999년 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관례는 의례로 인정되지 않다가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 다시 의례로 인정을 받는다. 혼례는 1973년부터 종교 의식을 특례로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회갑연도 의례로 인정받는다. 상례는 상기의 축소, 상복의 간소화 등이 강화된다. 제례는 기제사의 이대봉사, 절사, 연시제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정의례준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단속의 대상이 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일상생활의 변화로 상기의 단축, 상복의 변화, 봉사대수의 축소 등 많은 변화가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혼례의 이벤트화로 기획결혼식이 성업하고, 장례식장과 상조회사相助會社가 상례를 대행하면서 장례지도사가 새로운 직업군으로 등장하였다. 제사는 제사음식대행업체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직업군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개인의 상례를 대행하여 개인이 의례의 절차나 방법을 모르더라도 의례의 진행에는 문제가 없는 의례의 전문직업화 시대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양한 종교의례가 제 모습을 갖추어 현대사회의 관혼상제는 다양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내용

어떤 사회에 속한 개인이든 일생을 살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바꾸게 된다. 태어나서 부모의 부양을 받다가 신체의 성장에 따라 성인이 되고 혼인하여 가족을 이루며, 늙으면 노인으로서 부양을 받다가 죽음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관혼상제라는 하나의 통합된 가정의례의 질서 속에 수용하여 그 변화가 갖는 의미를 강조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혼란을 최소화하였다.

관례는 아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감을 알리는 성년의례成年儀禮로서 이것을 거쳐야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였다. 관례라 한 것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의관 정제를 정복으로 인정하였고, 관이나 머리쓰개를 써야 성인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을 쓰는 의례가 곧 성인으로 인정하는 의례인 것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최초의 의례인 혼례는 일생의 가장 큰 행사로 여겨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였다. 그 때문에 혼인을 의논하는 의혼議婚, 예물을 교환하고 편지를 주고받는 납채納采와 납폐納幣 등의 의례를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친영 제도보다는 반친영이나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변화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가족 구성원의 사망, 즉 식구의 죽음으로 인한 가족질서의 위기는 엄격한 상례 절차를 거치면서 극복하였다. 이를 위해 오복제도五服制度에 입각한 상복제도를 엄격히 하였고, 삼년상을 치르면서 혼란을 극복하고 충격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또한, 제례를 통해 조상과 자손의 유대를 지속하며 집의 영속성을 통해 가족 구성원의 화합과 질서를 추구하였다.

지역사례

조선시대의 정책적 장려로 보급·정착된 관혼상제였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집안이나 학파, 지역의 사정에 따라 실행 차원에서는 차이가 발생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집안, 학파, 지역에 따라 의례의 다름을 표현한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또한, 중국에 근거를 둔 『가례』는 조선의 상황에 맞게 긍정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고유문화와 융화하면서 지역 차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유교식 관혼상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헌작獻爵 방법이 학파에 따라 다르고, 제사상의 과일 진설법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도 유교식 관혼상제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의 작은 진통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관혼상제라는 의례의 전체 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세부적인 부분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경기도 지역에서는 혼례상에 반드시 용떡을 차린다. 그리고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신랑 집으로 가는 기간이 지역과 집안에 따라 달라 당일우귀當日于歸, 삼일우귀三日于歸, 심지어는 달묵이, 해묵이도 나타난다. 상례의 규정에는 없지만 성복제成服祭를 올리는 집안이 있고, 초분草墳을 만드는 서남 해안, 매장할 때 입관入棺하는 영남지역, 퇴관退棺하는 기호지역 등으로 차이가 있다. 제례에서는 제사상에 적을 올릴 때 도적都炙을 올리는 경상도, 산적散炙을 올리는 기호지역의 차이가 있다. 집안에 따라 고위와 비위를 합설하느냐 단설하느냐의 차이는 학문적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가례라는 지역, 학파, 집안의 차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특징 및 의의

서구의 영향을 받아 근대 학문으로서 수용된 인류학이나 민속학에서 개인의 일생의례를 보는 틀은 출생, 성년식, 혼례, 상례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관례, 혼례, 상례, 제례라는 틀로 짜여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일생의례는 제사를 범주에 넣지 않고 출생을 중요시하는 반면, 관혼상제는 출생을 배제하고 제례를 매우 중요시한다. 관혼상제가 관례부터 시작하는 것은 성년 전에는 완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祈子나 출산과 관련한 의례는 사람이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나 갓 태어난 상태에서는 의례의 중심이 될 수 없으므로 의례에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제례를 포함한 것은 가족공동체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집안의 영속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조상에게까지 효孝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서구의 일생의례에서는 사후의 효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주의 성향에 따라 출생 자체를 중요시하여 출생을 의례에 포함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혼상제는 조선시대의 성리학 이념에 따라 계획적으로 추진된 유교식 관혼상제가 한국 의례의 문화적 전통이 된 특성이 있다. 한국 의례의 문화적 전통으로 확립된 유교식 의례는 한국의 고유문화 및 신앙 등과 서로 융화하여 한국만의 관혼상제로 전승되었다는 점이 관혼상제의 특징이다.

참고문헌

三國志, 高麗圖經, 가정의례준칙, 가정의례준칙이 현행 상례에 미친영향(김시덕, 역사민속학12, 역사민속학회, 2001), 관혼상제례의 지역적 다양성과 조사방법(정승모, 역사민속학14, 한국역사민속학회, 2002), 박정희정권 시기 가정의례준칙과 근대화의 변용에 관한 연구(고원, 담론201 9-3, 한국사회역사학회, 2006), 일생의례의 역사(김시덕, 한국민속사입문, 지식산업사, 1996), 朝鮮原始諸種族の婚姻(張承斗, 朝鮮282, 朝鮮總督府, 1938).

관혼상제

관혼상제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관례|계례

집필자 김시덕(金時德)
갱신일 2018-10-12

정의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거쳐야 하는 대표적인 네가지 의례인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를 총칭하는 말.

역사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말은 『예기禮記』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그리고 여러 예서禮書에서 이미 관혼상제를 기본 의례로 다루고 있어 이 용어의 역사가 유구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유교식과 유사한 혼례와 상례가 행해졌으나 유교식 관혼상제의 개념이 확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혼례와 상례는 중국의 예禮를 원용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들이있지만, 그 형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예기 등의 고전적인 의례의 일부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 서옥제壻屋制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풍속을, 동옥저東沃沮의 10세 혼인약속 기록으로 혼인의 사전 약속 및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신랑이 백마를 타고, 초례 때 산 닭을 올리고 남녀가 서로 절을 하며, 예식 후에는 잔치를 하였다는 기록에서 유교식 혼례와 유사한 의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등의 기록을 보면, 상복을 입는 기간과 장사 지내는 기간이 정해져있었다. 동옥저에서는 곽槨을 사용하여 복차장複次葬을 하였으나, 다른 나라에서는 곽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신라에서는 지증왕 5년에 순장殉葬을 금하고, 상복법을 제정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혼인을 하면 곧바로 장사에 사용할 물건을 준비하고, 빈장을 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풍악을 울리며 장사를 지냈다. 또한 상이 나면 곡을 하고 부모와 남편은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등의 상기喪期가 정해져 있었다. 백제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풍속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사한 상례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도 유교식과 유사한 혼례, 상례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고려 초에 송宋에서 대묘당도大廟堂圖, 제기도祭器圖 등 유교식 의례 관련 그림을 가져오고 성종대成宗代에 국가의 주요 제도를 유교식으로 개편함으로써, 중국의 유교 의례가 본격적으로 수입된다. 965년(광종16)에 세자에게 원복元服을 입혔다는 기록으로 광종光宗·예종睿宗·의종대毅宗代에 관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혼례의 자세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자유혼이 많았고 예물을 주고받거나 술이나 쌀로 서로 호의를 교환하였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있었다. 고려 때에는 삼년상의 제도가 있었으나 역월제易月制를 적용하여 27일에 대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985년(성종4)에는 오복제도에 따라 복제를 정하고, 이에 따른 휴가 제도를 정비하여 체계적인 상례를 치렀던 것으로보인다. 경종대景宗代에는 부모 기일에 1일 낮과 2일 밤의 휴가를 주고, 성종成宗·헌종獻宗·문종文宗·명종대明宗代에는 조부모의 기일, 처부모의 기일은 물론 삭망제, 시제時祭(2일간)에도 휴가를 주었다. 이와 함께 절에 빈소를 마련하고 화장하는 등 불교식 상례가 번창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상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교식 상례나 불교식 상례는 상류층에서만 이루어지고 일반인들은 체계적인 상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는 거의 전 시대에 걸쳐 유교식 상례로 전환을 시도했던, 고례古禮의 모방시대였다. 고려 말기 신진 사대부들이 『가례家禮』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상례와 제례를 중심으로 유교식 관혼상제가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제도는 물론 관혼상제 역시 유교식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또한,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와 불교의례를 억압하고 승려를 혁파함과 동시에, 유교식 관혼상제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펴나간다. 유교식 의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는 일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신진사대부들의 몫이었다. 그 결과 16세기 초반부터 이미 조선식으로 저술된 예서禮書들이 등장한다. 정책적으로도 7품 이하 관료에게 의무적으로 『가례』를 시험 보게 하는 등 유교식 의례 보급에 전력한다. 특히,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1394),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 『경국대전經國大典』(1485) 등 법전을 편찬하여 정책적으로 모든 제도와 의례를 유교식으로 일원화해 나간다. 16~17세기가 되면 성리학자들의 예학 연구와 실학자의 실천예학 연구 등에 힘입어 한국인의 일생의례는 유교식 관혼상제라는 이름으로 일반화하기에 이른다. 200여 종이 넘는 예서가 출간되었다는 것은 유교식 관혼상제에 그만큼 관심이 컸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관혼상제는 『가례』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게 수정하면서 수용한다. 『가례』가 유교식 관혼상제의 법전처럼 ‘고정된 규정’이었다면, 이를 모본으로 하여 조선의 상황에 맞게 수정하여 저술한 예서들은 ‘비고정적 변화’였던 것이다. 여기서 변화란 중국에서 만들어진 유교식 관혼상제가 조선의 사정과 환경에 적합한 유교식 관혼상제로 재탄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관례가 보편적인 성년식이 되고, 혼례는 친영親迎과 반친영半親迎을 수용함과 동시에 주자朱子 사례四禮와 주육례周六禮를 동시에 받아들인다. 상례는 삼년상을 기본으로 삼았고, 제례는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사대봉사를 하는 등 유교식 관혼상제가 조선의 의례문화로 완전히 정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개항과 함께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관혼상제 역시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 말기 단발령 시행으로 관례와 계례筓禮가 쇠퇴하고, 전통 혼례 대신에 면사포와 웨딩드레스가 상징인 서구의 예배당 결혼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일제강점기가 되면 더욱 심화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혼상제는 일제의 탄압과 근대화의 영향으로 문화적 전통의 격변이라는 큰 위기를 맞는다. 혼례에서는 전통 혼례와 예배당 결혼식에 일본식 예식장 혼례가 도입된다. 제사는 사대봉사가 약화하고, 상례에는 일본식 화장을 도입하는 등 변화의 물결이 밀려든다. 급기야 1934년 조선총독부가 근대화를 명분으로 의례의 간소화를 강제하는 「의례준칙」을 공포함으로써 관혼상제 역시 바뀌는데, 관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혼·상·제례만을 의례로 인정하였다. 혼례에는 약혼約婚을 강조하고, 예배당이나 신사, 절에서도 혼례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상례는 기존의 삼년상을 축소하여 14일, 복을 입는 기간은 최대 2년으로 하였고, 양복을 상복으로 제시하였으며 , 기존의 견전遣奠을 없애고 단체장에서나 볼 수 있는 영결식永訣式을 발인發靷 전에 행하도록 하였다. 제사는 기제사와 묘제만을 인정하여 간소화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을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따랐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사례편람四禮便覽』(1844)이 1900년에 개정·증보되고, 이후에도 계속 출판되는 것을 보면 유교식 관혼상제의 문화적 전통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969년「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1969)과 함께 「가정의례준칙」이 공포되고, 1999년 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관례는 의례로 인정되지 않다가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 다시 의례로 인정을 받는다. 혼례는 1973년부터 종교 의식을 특례로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회갑연도 의례로 인정받는다. 상례는 상기의 축소, 상복의 간소화 등이 강화된다. 제례는 기제사의 이대봉사, 절사, 연시제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정의례준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단속의 대상이 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일상생활의 변화로 상기의 단축, 상복의 변화, 봉사대수의 축소 등 많은 변화가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혼례의 이벤트화로 기획결혼식이 성업하고, 장례식장과 상조회사相助會社가 상례를 대행하면서 장례지도사가 새로운 직업군으로 등장하였다. 제사는 제사음식대행업체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직업군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개인의 상례를 대행하여 개인이 의례의 절차나 방법을 모르더라도 의례의 진행에는 문제가 없는 의례의 전문직업화 시대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양한 종교의례가 제 모습을 갖추어 현대사회의 관혼상제는 다양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내용

어떤 사회에 속한 개인이든 일생을 살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바꾸게 된다. 태어나서 부모의 부양을 받다가 신체의 성장에 따라 성인이 되고 혼인하여 가족을 이루며, 늙으면 노인으로서 부양을 받다가 죽음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관혼상제라는 하나의 통합된 가정의례의 질서 속에 수용하여 그 변화가 갖는 의미를 강조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혼란을 최소화하였다. 관례는 아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감을 알리는 성년의례成年儀禮로서 이것을 거쳐야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였다. 관례라 한 것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의관 정제를 정복으로 인정하였고, 관이나 머리쓰개를 써야 성인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을 쓰는 의례가 곧 성인으로 인정하는 의례인 것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최초의 의례인 혼례는 일생의 가장 큰 행사로 여겨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였다. 그 때문에 혼인을 의논하는 의혼議婚, 예물을 교환하고 편지를 주고받는 납채納采와 납폐納幣 등의 의례를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친영 제도보다는 반친영이나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변화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가족 구성원의 사망, 즉 식구의 죽음으로 인한 가족질서의 위기는 엄격한 상례 절차를 거치면서 극복하였다. 이를 위해 오복제도五服制度에 입각한 상복제도를 엄격히 하였고, 삼년상을 치르면서 혼란을 극복하고 충격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또한, 제례를 통해 조상과 자손의 유대를 지속하며 집의 영속성을 통해 가족 구성원의 화합과 질서를 추구하였다.

지역사례

조선시대의 정책적 장려로 보급·정착된 관혼상제였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집안이나 학파, 지역의 사정에 따라 실행 차원에서는 차이가 발생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집안, 학파, 지역에 따라 의례의 다름을 표현한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또한, 중국에 근거를 둔 『가례』는 조선의 상황에 맞게 긍정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고유문화와 융화하면서 지역 차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유교식 관혼상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헌작獻爵 방법이 학파에 따라 다르고, 제사상의 과일 진설법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도 유교식 관혼상제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의 작은 진통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관혼상제라는 의례의 전체 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세부적인 부분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경기도 지역에서는 혼례상에 반드시 용떡을 차린다. 그리고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신랑 집으로 가는 기간이 지역과 집안에 따라 달라 당일우귀當日于歸, 삼일우귀三日于歸, 심지어는 달묵이, 해묵이도 나타난다. 상례의 규정에는 없지만 성복제成服祭를 올리는 집안이 있고, 초분草墳을 만드는 서남 해안, 매장할 때 입관入棺하는 영남지역, 퇴관退棺하는 기호지역 등으로 차이가 있다. 제례에서는 제사상에 적을 올릴 때 도적都炙을 올리는 경상도, 산적散炙을 올리는 기호지역의 차이가 있다. 집안에 따라 고위와 비위를 합설하느냐 단설하느냐의 차이는 학문적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가례라는 지역, 학파, 집안의 차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특징 및 의의

서구의 영향을 받아 근대 학문으로서 수용된 인류학이나 민속학에서 개인의 일생의례를 보는 틀은 출생, 성년식, 혼례, 상례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관례, 혼례, 상례, 제례라는 틀로 짜여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일생의례는 제사를 범주에 넣지 않고 출생을 중요시하는 반면, 관혼상제는 출생을 배제하고 제례를 매우 중요시한다. 관혼상제가 관례부터 시작하는 것은 성년 전에는 완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祈子나 출산과 관련한 의례는 사람이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나 갓 태어난 상태에서는 의례의 중심이 될 수 없으므로 의례에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제례를 포함한 것은 가족공동체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집안의 영속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조상에게까지 효孝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서구의 일생의례에서는 사후의 효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주의 성향에 따라 출생 자체를 중요시하여 출생을 의례에 포함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혼상제는 조선시대의 성리학 이념에 따라 계획적으로 추진된 유교식 관혼상제가 한국 의례의 문화적 전통이 된 특성이 있다. 한국 의례의 문화적 전통으로 확립된 유교식 의례는 한국의 고유문화 및 신앙 등과 서로 융화하여 한국만의 관혼상제로 전승되었다는 점이 관혼상제의 특징이다.

참고문헌

三國志, 高麗圖經, 가정의례준칙, 가정의례준칙이 현행 상례에 미친영향(김시덕, 역사민속학12, 역사민속학회, 2001), 관혼상제례의 지역적 다양성과 조사방법(정승모, 역사민속학14, 한국역사민속학회, 2002), 박정희정권 시기 가정의례준칙과 근대화의 변용에 관한 연구(고원, 담론201 9-3, 한국사회역사학회, 2006), 일생의례의 역사(김시덕, 한국민속사입문, 지식산업사, 1996), 朝鮮原始諸種族の婚姻(張承斗, 朝鮮282, 朝鮮總督府,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