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고마나루웅진단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이해준(李海濬)
갱신일 2016-10-27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고마나루에서 백제시대 때부터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장(祭場).

형태

웅진단은 공주 고마나루[熊津] 기슭 솔밭에 있다. 현재 이곳에는 ‘웅진수신지처(熊津水神之處)’라고 새긴 표석과 함께 작은 단이 조성되어 있다. 이는 1998년에 계룡산 산신제 복원과 함께 이곳의 수신제(水神祭)도 복원하면서 조성한 것이다. 원래 웅진사의 터는 명확하지 않고, 곰신상이 1970년대에 웅진동 곰내골에서 발견되어 웅진단을 새로 짓고 이곳에 고마나루 전설비와 곰상을 모시고 있다. 고마나루 일대는 2006년 12월 4일에 ‘명승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고마나루는 금강의 옛 나루터로 ‘웅진’, ‘곰나루’로 불리기도 한다. 고마나루에는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이 공주의 나무꾼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다가 나무꾼이 도망을 가자 새끼들을 차례로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자신도 빠져 죽었다. 그 후 곰의 원혼이 금강에 풍랑을 일으켜 나룻배를 뒤집히게 하자 곰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곰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니 무사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마나루의 수신제사 터는 ‘웅진단(熊津壇)’, ‘웅진사(熊津祠)’, ‘용당’ 등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마나루 남쪽 언덕에 웅진사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전하면서 신라 때는 서독(西瀆), 조선 때는 남독(南瀆)으로 중사(中祀)에 포함되어 있어 봄과 가을에 향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제사조에는 웅천제(熊川祭)는 신라의 4독 가운데 서독으로서 중사에 편성되어 있었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웅진사는 중사 13곳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웅진단(사)에서의 제향은 한말 이후 폐지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까지 정월대보름날에 민간에서 당굿 형태로 지속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기우제 등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98년에 계룡산산신제가 복원되면서 매년 음력 삼월 열엿샛날을 전후하여 계룡산산신제 행사의 일환으로 새로 조성한 웅진단에서 수신제를 지내고 있다.

내용

고마나루에는 오랜 전설이 전해지며, 고대사회에서부터 국가 제사로 이어오던 웅진단의 수신제는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국가의 수신 제사처로 기려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에 의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는 악(嶽)·해(海)·독(瀆) 제사법과 절차에 따라 유교식 제의[中祀]로 존속되다가 한말에 철폐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간에서 당굿이나 기우제 형태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역시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
三國史記
世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공주지방의 민속신앙 (구중회, 공주문화원, 1995)
공주시지 (공주시지편찬위원회, 2002)
고마나루 설화가 갖는 민속학적 의미와 활용방안 (구중회, 충청학과 충청문화 6,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2007)
고마나루의 역사와 변천 (윤용혁, 충청학과 충청문화 6,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2007)

공주고마나루웅진단

공주고마나루웅진단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이해준(李海濬)
갱신일 2016-10-27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고마나루에서 백제시대 때부터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장(祭場).

형태

웅진단은 공주 고마나루[熊津] 기슭 솔밭에 있다. 현재 이곳에는 ‘웅진수신지처(熊津水神之處)’라고 새긴 표석과 함께 작은 단이 조성되어 있다. 이는 1998년에 계룡산 산신제 복원과 함께 이곳의 수신제(水神祭)도 복원하면서 조성한 것이다. 원래 웅진사의 터는 명확하지 않고, 곰신상이 1970년대에 웅진동 곰내골에서 발견되어 웅진단을 새로 짓고 이곳에 고마나루 전설비와 곰상을 모시고 있다. 고마나루 일대는 2006년 12월 4일에 ‘명승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고마나루는 금강의 옛 나루터로 ‘웅진’, ‘곰나루’로 불리기도 한다. 고마나루에는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이 공주의 나무꾼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다가 나무꾼이 도망을 가자 새끼들을 차례로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자신도 빠져 죽었다. 그 후 곰의 원혼이 금강에 풍랑을 일으켜 나룻배를 뒤집히게 하자 곰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곰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니 무사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마나루의 수신제사 터는 ‘웅진단(熊津壇)’, ‘웅진사(熊津祠)’, ‘용당’ 등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마나루 남쪽 언덕에 웅진사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전하면서 신라 때는 서독(西瀆), 조선 때는 남독(南瀆)으로 중사(中祀)에 포함되어 있어 봄과 가을에 향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제사조에는 웅천제(熊川祭)는 신라의 4독 가운데 서독으로서 중사에 편성되어 있었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웅진사는 중사 13곳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웅진단(사)에서의 제향은 한말 이후 폐지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까지 정월대보름날에 민간에서 당굿 형태로 지속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기우제 등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98년에 계룡산산신제가 복원되면서 매년 음력 삼월 열엿샛날을 전후하여 계룡산산신제 행사의 일환으로 새로 조성한 웅진단에서 수신제를 지내고 있다.

내용

고마나루에는 오랜 전설이 전해지며, 고대사회에서부터 국가 제사로 이어오던 웅진단의 수신제는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국가의 수신 제사처로 기려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에 의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는 악(嶽)·해(海)·독(瀆) 제사법과 절차에 따라 유교식 제의[中祀]로 존속되다가 한말에 철폐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간에서 당굿이나 기우제 형태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역시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三國史記世宗實錄新增東國輿地勝覽공주지방의 민속신앙 (구중회, 공주문화원, 1995)공주시지 (공주시지편찬위원회, 2002)고마나루 설화가 갖는 민속학적 의미와 활용방안 (구중회, 충청학과 충청문화 6,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2007)고마나루의 역사와 변천 (윤용혁, 충청학과 충청문화 6,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