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지원(尹智嫄)
갱신일 2018-10-11

정의

옷가지를 충해와 얼룩, 구김이 가지 않도록 잘 개키거나 걸어서 보관하는 일.

개관

유교 사상이 생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던 조선시대에는, 청결이 곧 ‘예禮’임을 강조했기에 의복을 깨끗하게 손질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조선 후기 문헌에 옷을 보관하는 방법, 보관할 때 넣는 향香을 만드는 방법, 옷에 이나 좀 같은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옷의 보관은 중요했다. 대표적인 문헌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여러 가지 갈무리 법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

옷을 갈무리하는 도구는 생활 형편에 따라 매우 다양했다. 여유가 있으면 옷을 걸어 보관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개켜서 보관하는 농· 반닫이·고리짝·함·궤 등을 사용하였다.
형태와 크기는 대부분 가정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 썼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으며, 재료는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견고하여 최상으로 쳤다. 궤는 보통 대물림하였는데, 궤를 마련하는 일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매우 힘들었다. 궤를 마련할 형편이 못되면 왕골이나 대나무, 칡 등으로 얽은 동고리를 사용하였는데, 동고리에는 종이를 바르거나 떨어진 옷가지를 발랐다. 이도 없을 때는 횃대를 이용하였다.
수시로 입는 외출복을 걸어두었던 횃대는 중요한 의복 수납공간의 하나로 방벽에 설치하여 사용했다. 주로 나무로 만들었으며, 충해 방지에 좋은 오동나무가 많이 사용되었다.
1. 방충: 옷가지 보관에서 가장 주의할 것은 충해와 얼룩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충해로 좀 먹는 것을 막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좀이 스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거풍擧風을 하거나 약초류를 함께 두었다. 방충약이 개발되지 않았을 때는 좀이 슬지 않도록 담뱃잎이나 박하, 장뇌를 옷 사이사이에 끼워 두었다.
특히 가죽이나 모피, 비단 같은 동물성 단백질로 이루어진 소재의 경우, 오늘날의 나프탈렌처럼 방충제의 역할을 대신하는 방법이 있었다. 좀이 스는 것을 막기 위해 팥꽃나무의 꽃, 산초나무 열매, 쑥, 담배 줄기와 잎, 궁궁이잎(미나리과), 재 등을 방충제로 사용하였으며, 쪽물을 들인 백포白布로 감싸기도 했다. 곰팡이나 쥐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였는데, 곰팡이는 풀기가 있거나 습한 곳에 잘 생기기 때문에 옷을 입다가 둘 때에는 반드시 빨아서 풀기를 빼고 보관하였다.
2. 관리: 털옷은 가는 대나 반반한 막대로 털을 두드려 볕 뵈기를 자주 하여야 털이 빠져 상하는 일이 없다. 자주 햇볕에 쏘이더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털이 빠진다고 제시한다.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된다. 우의나 우모는 사용한 후 곧바로 잘 털어서 대나무 장대에 건 뒤,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잘 말려야 한다. 다만햇볕을 직접 쬐면 옷이 상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가죽신은 신발 바닥을 말려서 써야 하며 습해지면 금방 바스러진다. 진흙이 묻었을 때는 반드시 젖은 걸레로 진흙을 닦아 내고 바람 부는 곳에서 말려야 한다. 그리고 돼지기름으로 가죽을 잘 닦고, 기름으로 신발 바닥도 닦아 두어야 한다.
보관하던 옷을 햇볕과 바람에 쐬는 거풍 풍습도 있었다. 거풍은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있었던 의복에 공기와 햇볕을 통하게 하는 작업으로서 좀이 슬거나 옷이 상하게 되는 일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거풍은 일반 의복에도 적용되었지만, 주로 수의壽衣에 엄격하게 적용하여 관리에 신경을 썼다. 수의는 명주로 만드는데, 특히 명주는 좀이 잘 슬기 때문에 신경 써서 보관하고 거풍한다. 거풍은 기회가 있으면 자주 하였으나, 거풍하기 좋은 날은 음력 칠월칠석이라 하여 1년에 한 차례씩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기를 음력 칠월 칠석으로 택한 것은 이 시기가 절기상 장마가 끝난 직후라, 습해진 의복을 꺼내 거풍하기에 가장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보관: 의복을 개어 보관할 때에는 붉은 실로 상하의에 따라 표시하고 격식대로 개었다. 두루마기저고리 등 윗옷에는 ‘상上’ 자로, 아래옷일 때는 ‘하下’ 자로 표시하여 징겄다. 이 표시가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개개인마다 표시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쌍으로 되는 버선이나 토수 등은 짝을 맞추고 십十 자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혼례복이나 수의처럼 오랫동안 입지 않는 의복은 각각 종이에 하나씩 싸서 큰 상자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렇게 자주 입지 않는 의복은 방보다는 광에 보관할 때가 많았다.
보관하는 도구는 많지 않았다. 그만큼 의료衣料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로 보관하는 것은 명절빔이나 외출용, 계절에 따른 옷 정도였다. 옷을 보관할 때는 주로 장藏이나 고리짝을 이용하였다. 장은 대부분 이층장이었는데 주로 혼인 때 마련한다. 장은 이층장, 삼층장 등이 있었으며 나무로 만든 반닫이나 칡, 대나무 등을 얽어서 만든 동고리 등이 사용되었다. 궤의 형태와 크기는 대부분 가정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 썼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재료는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견고하여 최상으로 쳤으며, 보통 대물림하여 사용하였다.
궤를 마련할 형편이 못되면 왕골이나 대나무, 칡 등으로 얽은 동고리를 사용하였는데, 동고리에는 종이를 바르거나 헤진 옷을 발라 사용했다. 자주 입는 옷은 횃대에 걸어 두었는데, 지금의 옷걸이에 해당한다. 횃대는 주로 굵은 대나무로 만들어 방에 설치하였는데, 끈을 이용해 방벽에 수평으로 매달아 사용하였다. 이 경우 벽의 습기로 인해 옷이 상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이르고 있다.

특징 및 의의

갈무리에도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이 남아 있었다. 즉, 남아男兒가 사용했던 포대기나 옷은 동생에게 물림이 되지만, “여아가 입던 옷을 남아가 입으면 재수가 없다.”라고 생각해 사용을 꺼려했다. 남아가 입었던 것은 길복吉福이라 여겨 많이 이용되었다. 남아 중에서도 장남 것이 좋고, 특히 장손 것이 더 효험 있다 생각해 소중히 간직하였다가 시험 보러 갈 때, 재판정에 나갈 때, 전쟁터에 나갈 때에 이용하였다.
옷 만들 때, 다림질할 때, 빨래할 때도 남자 것이 우선이었다. 그 이유는, 여자 것을 남자 것보다 먼저 할 경우, 또는 여자 물건이 남자 물건 옆에 있으면 남자의 출셋길이 막히고 재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옷을 보관할 때에도 남존여비 사상에 따른 금기가 있었기 때문에 남녀의 복식은 결코 함께 보관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경기민속지-의식주(경기도박물관, 2001), 문헌으로 본 한국 전통 의복관리법 연구(한지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의생활(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한국복식 2천년(국립민속박물관, 1996).

갈무리

갈무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지원(尹智嫄)
갱신일 2018-10-11

정의

옷가지를 충해와 얼룩, 구김이 가지 않도록 잘 개키거나 걸어서 보관하는 일.

개관

유교 사상이 생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던 조선시대에는, 청결이 곧 ‘예禮’임을 강조했기에 의복을 깨끗하게 손질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조선 후기 문헌에 옷을 보관하는 방법, 보관할 때 넣는 향香을 만드는 방법, 옷에 이나 좀 같은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옷의 보관은 중요했다. 대표적인 문헌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여러 가지 갈무리 법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

옷을 갈무리하는 도구는 생활 형편에 따라 매우 다양했다. 여유가 있으면 옷을 걸어 보관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개켜서 보관하는 농· 반닫이·고리짝·함·궤 등을 사용하였다.형태와 크기는 대부분 가정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 썼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으며, 재료는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견고하여 최상으로 쳤다. 궤는 보통 대물림하였는데, 궤를 마련하는 일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매우 힘들었다. 궤를 마련할 형편이 못되면 왕골이나 대나무, 칡 등으로 얽은 동고리를 사용하였는데, 동고리에는 종이를 바르거나 떨어진 옷가지를 발랐다. 이도 없을 때는 횃대를 이용하였다.수시로 입는 외출복을 걸어두었던 횃대는 중요한 의복 수납공간의 하나로 방벽에 설치하여 사용했다. 주로 나무로 만들었으며, 충해 방지에 좋은 오동나무가 많이 사용되었다.1. 방충: 옷가지 보관에서 가장 주의할 것은 충해와 얼룩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충해로 좀 먹는 것을 막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좀이 스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거풍擧風을 하거나 약초류를 함께 두었다. 방충약이 개발되지 않았을 때는 좀이 슬지 않도록 담뱃잎이나 박하, 장뇌를 옷 사이사이에 끼워 두었다.특히 가죽이나 모피, 비단 같은 동물성 단백질로 이루어진 소재의 경우, 오늘날의 나프탈렌처럼 방충제의 역할을 대신하는 방법이 있었다. 좀이 스는 것을 막기 위해 팥꽃나무의 꽃, 산초나무 열매, 쑥, 담배 줄기와 잎, 궁궁이잎(미나리과), 재 등을 방충제로 사용하였으며, 쪽물을 들인 백포白布로 감싸기도 했다. 곰팡이나 쥐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였는데, 곰팡이는 풀기가 있거나 습한 곳에 잘 생기기 때문에 옷을 입다가 둘 때에는 반드시 빨아서 풀기를 빼고 보관하였다.2. 관리: 털옷은 가는 대나 반반한 막대로 털을 두드려 볕 뵈기를 자주 하여야 털이 빠져 상하는 일이 없다. 자주 햇볕에 쏘이더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털이 빠진다고 제시한다.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된다. 우의나 우모는 사용한 후 곧바로 잘 털어서 대나무 장대에 건 뒤,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잘 말려야 한다. 다만햇볕을 직접 쬐면 옷이 상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가죽신은 신발 바닥을 말려서 써야 하며 습해지면 금방 바스러진다. 진흙이 묻었을 때는 반드시 젖은 걸레로 진흙을 닦아 내고 바람 부는 곳에서 말려야 한다. 그리고 돼지기름으로 가죽을 잘 닦고, 기름으로 신발 바닥도 닦아 두어야 한다.보관하던 옷을 햇볕과 바람에 쐬는 거풍 풍습도 있었다. 거풍은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있었던 의복에 공기와 햇볕을 통하게 하는 작업으로서 좀이 슬거나 옷이 상하게 되는 일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거풍은 일반 의복에도 적용되었지만, 주로 수의壽衣에 엄격하게 적용하여 관리에 신경을 썼다. 수의는 명주로 만드는데, 특히 명주는 좀이 잘 슬기 때문에 신경 써서 보관하고 거풍한다. 거풍은 기회가 있으면 자주 하였으나, 거풍하기 좋은 날은 음력 칠월칠석이라 하여 1년에 한 차례씩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기를 음력 칠월 칠석으로 택한 것은 이 시기가 절기상 장마가 끝난 직후라, 습해진 의복을 꺼내 거풍하기에 가장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다.3. 보관: 의복을 개어 보관할 때에는 붉은 실로 상하의에 따라 표시하고 격식대로 개었다. 두루마기나 저고리 등 윗옷에는 ‘상上’ 자로, 아래옷일 때는 ‘하下’ 자로 표시하여 징겄다. 이 표시가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개개인마다 표시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쌍으로 되는 버선이나 토수 등은 짝을 맞추고 십十 자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혼례복이나 수의처럼 오랫동안 입지 않는 의복은 각각 종이에 하나씩 싸서 큰 상자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렇게 자주 입지 않는 의복은 방보다는 광에 보관할 때가 많았다.보관하는 도구는 많지 않았다. 그만큼 의료衣料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로 보관하는 것은 명절빔이나 외출용, 계절에 따른 옷 정도였다. 옷을 보관할 때는 주로 장藏이나 고리짝을 이용하였다. 장은 대부분 이층장이었는데 주로 혼인 때 마련한다. 장은 이층장, 삼층장 등이 있었으며 나무로 만든 반닫이나 칡, 대나무 등을 얽어서 만든 동고리 등이 사용되었다. 궤의 형태와 크기는 대부분 가정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 썼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재료는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견고하여 최상으로 쳤으며, 보통 대물림하여 사용하였다.궤를 마련할 형편이 못되면 왕골이나 대나무, 칡 등으로 얽은 동고리를 사용하였는데, 동고리에는 종이를 바르거나 헤진 옷을 발라 사용했다. 자주 입는 옷은 횃대에 걸어 두었는데, 지금의 옷걸이에 해당한다. 횃대는 주로 굵은 대나무로 만들어 방에 설치하였는데, 끈을 이용해 방벽에 수평으로 매달아 사용하였다. 이 경우 벽의 습기로 인해 옷이 상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이르고 있다.

특징 및 의의

갈무리에도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이 남아 있었다. 즉, 남아男兒가 사용했던 포대기나 옷은 동생에게 물림이 되지만, “여아가 입던 옷을 남아가 입으면 재수가 없다.”라고 생각해 사용을 꺼려했다. 남아가 입었던 것은 길복吉福이라 여겨 많이 이용되었다. 남아 중에서도 장남 것이 좋고, 특히 장손 것이 더 효험 있다 생각해 소중히 간직하였다가 시험 보러 갈 때, 재판정에 나갈 때, 전쟁터에 나갈 때에 이용하였다.옷 만들 때, 다림질할 때, 빨래할 때도 남자 것이 우선이었다. 그 이유는, 여자 것을 남자 것보다 먼저 할 경우, 또는 여자 물건이 남자 물건 옆에 있으면 남자의 출셋길이 막히고 재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옷을 보관할 때에도 남존여비 사상에 따른 금기가 있었기 때문에 남녀의 복식은 결코 함께 보관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경기민속지-의식주(경기도박물관, 2001), 문헌으로 본 한국 전통 의복관리법 연구(한지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의생활(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한국복식 2천년(국립민속박물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