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체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조희진(趙熙眞)
갱신일 2018-10-11

정의

별도의 머리카락이나 여러가지 재료로 만든 장식을 덧붙여 얹어 고정한 머리채 모양의 장식.

개관

가체加髰는 그 연원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수식首飾이다. 중국의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신라의 여인들이 “미발美髮을 머리에 감고[繚首] 주채珠釵로 장식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723년(성덕왕 22) 신라가 당나라로 보낸 예물 목록에서 수식용首飾用 머리카락 ‘미체美髢’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후 869년(경문왕 9)에는 4척 5촌 길이의 두발 150냥과 3척 5촌 길이의 두발 300냥을 역시 당나라로 보내면서 그 용도를 머리 꾸밈으로 명시했다.
조선 후기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文」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때 가발을 만들어 머리에 둘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동국부녀수식변증설東國婦女首飾辨證說에는 “신라 부인들이 아름다운 가발을 머리에 감았다.”라는 기록을 통해 가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익과 이규경이 가체를 중국 은나라의 유제遺制로 본 것과 달리 1756년(영조 3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몽골의 제도”라고 기록되었으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쓴 이덕무李德懋 역시 “다리를 땋아 머리 위에 얹는 것은 몽골 사람들이 남긴 풍습”이라고 설명했다.

내용

머리채를 꾸미기 위해 덧붙이는 별도의 머리카락은 체髢, 수체首髢, 체발髢髮, 월자月子, 다리, 다래, 달비 등으로 불리며, 이를 통칭하여 가짜 머리카락, 즉 가체假髢라 한다. 조선 중기 이후 가체는 사회적인 문제를 양산하는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신분이나 계급의 구분 없이 많은 양의 다리를 사용해 장식하는 풍습이 확산되면서 잘라 파는 머리카락의 가격이 상승했으며, 그 위에 장신구를 덧붙이는 사치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부녀자들의 가체 사용이 금지된 것은 1756년(영조 32) 1월의 일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대부가의 사치가 날로 성하여, 부인이 한 번 가체를 하는 데 몇백 금金을 썼다. 갈수록 서로 자랑하여 높고 큰 것을 숭상하기에 힘썼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영조는 부녀자의 머리 모양을 바꾸어 가체 사용을 막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 하지만 1763년(영조 39) 11월에 다리 대신 사용한 족두리를 보석으로 꾸미면 가체에 드는 비용과 다를 바 없다 하여 족두리를 폐하고 머리 모양을 본래대로 되돌렸다. 이후 1788년(정조 12) 10월에 비변사備邊司에서 가체신금절목加髢申禁節目을 올려 가체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려 했으나 풍속이 바로잡히지 않아 조정의 논의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가체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혼인을 미루고 혼인을 한 후에도 시부모 뵙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치르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가체는 사치를 부추기고 인륜을 폐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당시의 가체 사치에 대해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부유한 가정에서는 머리 단장에 돈을 7~8만 냥이나 소비한다고 하는데,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옆으로 빙빙 돌려서 한쪽으로 기우뚱한 머리채를 만들고는 웅황판雄黃板이나 옥으로 만든 비녀 등으로 꾸며 그 무게가 거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형편인데도 가장은 이를 금하지 못하여 부녀자들은 더욱 사치를 하고 그 머리가 남의 것보다 작을까 걱정한다.”라고 기록했으며, “한 부잣집에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나이가 겨우 13세였다. 그는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므로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그만 목뼈가 부러졌다. 이렇듯 사치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라고 사치스러운 가체와 그로부터 야기된 부작용을 비판했다. 이익 또한 “지금 풍속은 반드시 남의 머리털을 취하는데,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도 가리지 않고 부인들이 장식품을 만드니 이는 아주 불가한 짓이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박규수朴珪壽 역시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에 “남의 머리털을 훼손시켜 자신을 꾸미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게는 그 부모가 물려준 몸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부유하고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가하는 것이어서 인서仁恕를 둘 다 상하게 하는 도리”라는 점을 들어 가체의 폐단을 지적했다.

특징 및 의의

인모人毛 가체는 한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 묶거나 여러 사람의 것을 모아서 만들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윗부분을 모아 묶은 뒤에 옷감으로 감싸거나 꿰매어 고정했는데, 다리의 크기는 손가락처럼 가느다랗고 길이가 20~30 내외로 짧은 것부터 두께가 5~6, 길이가 1 내외에 이르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다리는 머리카락을 모아 전체를 하나로 땋은 것, 머리카락을 잘라 윗부분만 묶은 것, 궁중장신구 첩지 고정용으로 붙인 것, 땋아서 쪽진 모양으로 만든 것 등이 있으며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제작했다.
다리를 이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반복적으로 넣어 길이와 부피를 연장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런 모습은 신윤복의 그림 <계변가화溪邊佳話>에 잘 나타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아예 땋거나 쪽진 모양으로 만든 가체를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 얹거나 덧붙여 고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체는 끝부분을 20~30쯤 남기고 자주색이나 검은색의 가느다란 댕기를 넣어 함께 땋은 뒤에 모양을 정리한다. 다리에 댕기를 넣어 땋으면 짧은 머리카락이 가장자리로 튀어나와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끝부분에 머리카락이 뭉툭하게 남지 않아 본래의 머리채에 붙여 마무리하기가 쉽다. 1788년(정조 12) 가체신금절목이 시행된 이후에는 머리카락 대신 나무로 만든 떠구지나 머리카락과 옷감을 엮어 만든 다리가 사용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居家雜服考, 士小節,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靑莊館全書, 선비와 피어싱(조희진, 동아시아, 2003),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가체

가체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조희진(趙熙眞)
갱신일 2018-10-11

정의

별도의 머리카락이나 여러가지 재료로 만든 장식을 덧붙여 얹어 고정한 머리채 모양의 장식.

개관

가체加髰는 그 연원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수식首飾이다. 중국의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신라의 여인들이 “미발美髮을 머리에 감고[繚首] 주채珠釵로 장식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723년(성덕왕 22) 신라가 당나라로 보낸 예물 목록에서 수식용首飾用 머리카락 ‘미체美髢’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후 869년(경문왕 9)에는 4척 5촌 길이의 두발 150냥과 3척 5촌 길이의 두발 300냥을 역시 당나라로 보내면서 그 용도를 머리 꾸밈으로 명시했다. 조선 후기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文」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때 가발을 만들어 머리에 둘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동국부녀수식변증설東國婦女首飾辨證說에는 “신라 부인들이 아름다운 가발을 머리에 감았다.”라는 기록을 통해 가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익과 이규경이 가체를 중국 은나라의 유제遺制로 본 것과 달리 1756년(영조 3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몽골의 제도”라고 기록되었으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쓴 이덕무李德懋 역시 “다리를 땋아 머리 위에 얹는 것은 몽골 사람들이 남긴 풍습”이라고 설명했다.

내용

머리채를 꾸미기 위해 덧붙이는 별도의 머리카락은 체髢, 수체首髢, 체발髢髮, 월자月子, 다리, 다래, 달비 등으로 불리며, 이를 통칭하여 가짜 머리카락, 즉 가체假髢라 한다. 조선 중기 이후 가체는 사회적인 문제를 양산하는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신분이나 계급의 구분 없이 많은 양의 다리를 사용해 장식하는 풍습이 확산되면서 잘라 파는 머리카락의 가격이 상승했으며, 그 위에 장신구를 덧붙이는 사치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부녀자들의 가체 사용이 금지된 것은 1756년(영조 32) 1월의 일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대부가의 사치가 날로 성하여, 부인이 한 번 가체를 하는 데 몇백 금金을 썼다. 갈수록 서로 자랑하여 높고 큰 것을 숭상하기에 힘썼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영조는 부녀자의 머리 모양을 바꾸어 가체 사용을 막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다. 하지만 1763년(영조 39) 11월에 다리 대신 사용한 족두리를 보석으로 꾸미면 가체에 드는 비용과 다를 바 없다 하여 족두리를 폐하고 머리 모양을 본래대로 되돌렸다. 이후 1788년(정조 12) 10월에 비변사備邊司에서 가체신금절목加髢申禁節目을 올려 가체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려 했으나 풍속이 바로잡히지 않아 조정의 논의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가체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혼인을 미루고 혼인을 한 후에도 시부모 뵙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치르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가체는 사치를 부추기고 인륜을 폐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당시의 가체 사치에 대해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부유한 가정에서는 머리 단장에 돈을 7~8만 냥이나 소비한다고 하는데,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옆으로 빙빙 돌려서 한쪽으로 기우뚱한 머리채를 만들고는 웅황판雄黃板이나 옥으로 만든 비녀 등으로 꾸며 그 무게가 거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형편인데도 가장은 이를 금하지 못하여 부녀자들은 더욱 사치를 하고 그 머리가 남의 것보다 작을까 걱정한다.”라고 기록했으며, “한 부잣집에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나이가 겨우 13세였다. 그는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므로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그만 목뼈가 부러졌다. 이렇듯 사치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라고 사치스러운 가체와 그로부터 야기된 부작용을 비판했다. 이익 또한 “지금 풍속은 반드시 남의 머리털을 취하는데,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도 가리지 않고 부인들이 장식품을 만드니 이는 아주 불가한 짓이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박규수朴珪壽 역시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에 “남의 머리털을 훼손시켜 자신을 꾸미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게는 그 부모가 물려준 몸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부유하고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가하는 것이어서 인서仁恕를 둘 다 상하게 하는 도리”라는 점을 들어 가체의 폐단을 지적했다.

특징 및 의의

인모人毛 가체는 한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 묶거나 여러 사람의 것을 모아서 만들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윗부분을 모아 묶은 뒤에 옷감으로 감싸거나 꿰매어 고정했는데, 다리의 크기는 손가락처럼 가느다랗고 길이가 20~30 내외로 짧은 것부터 두께가 5~6, 길이가 1 내외에 이르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다리는 머리카락을 모아 전체를 하나로 땋은 것, 머리카락을 잘라 윗부분만 묶은 것, 궁중장신구 첩지 고정용으로 붙인 것, 땋아서 쪽진 모양으로 만든 것 등이 있으며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제작했다. 다리를 이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반복적으로 넣어 길이와 부피를 연장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런 모습은 신윤복의 그림 에 잘 나타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아예 땋거나 쪽진 모양으로 만든 가체를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 얹거나 덧붙여 고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체는 끝부분을 20~30쯤 남기고 자주색이나 검은색의 가느다란 댕기를 넣어 함께 땋은 뒤에 모양을 정리한다. 다리에 댕기를 넣어 땋으면 짧은 머리카락이 가장자리로 튀어나와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끝부분에 머리카락이 뭉툭하게 남지 않아 본래의 머리채에 붙여 마무리하기가 쉽다. 1788년(정조 12) 가체신금절목이 시행된 이후에는 머리카락 대신 나무로 만든 떠구지나 머리카락과 옷감을 엮어 만든 다리가 사용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居家雜服考, 士小節,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靑莊館全書, 선비와 피어싱(조희진, 동아시아, 2003),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